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이란 Dec 14. 2023

살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한동안 나는 예능 프로그램에 푹 빠져 지냈다. 주말 오후에 깔깔 웃으며 밥 먹는 걸 좋아하는데 때마침 밥상 앞에 틀어 놓기 딱 좋은 프로그램을 찾은 덕분이었다. 제목은 <서진이네>. 앞서 방영한 <윤식당>라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출연진들이 해외에서 작은 분식점을 차리고 가게를 운영하는 과정을 담았다고 하여 시청하기 시작했다. 유명 스타들이 김밥을 말고 서빙을 하는 모습이 새롭기도 하였고, 특히 한민국의 분식을 내걸고 멕시코, 그러니까 지구 반대편에서 장사를 한다니 도대체 무엇을 팔며 그걸 먹는 현지인들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분식을 먹은 외국인들의 반응을 살피며 온갖 훈수를 두었다. '김밥은 모름지기 한 입에 넣어 제 맛이지, 저걸 몇 입에 나눠 베어 먹다니!' '아니, 어떻게 라면만 딸랑 주문해?' '저거로는 양이 부족할 텐데 쯧쯧', '식기 전에 면치기를 해야 땀이 쏙 빠지지'. 듣는 이 없는 화면에 대고 혼자 아는 척을 늘어놓고는 이렇게 먹어야 하는 거라고 보여주듯 능숙하게 밥그릇을 비우는 식이었다.  


타국에서 먹음직스러운 때깔을 잃지 않고 존재감을 뽐내는 분식들의 자태를 볼 때마다 괜히 자랑스럽고 황홀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핫도그와 떡볶이가 나올 때마다 내 마음은 어수선했다. 갓 튀긴 핫도그의 질감, 양념을 촉촉하게 바른 떡볶이를 마치 화장품 광고를 찍듯 가까이 끌어당겨 화면에 담은 탓이었다. 포크로 집은 떡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걸 보고 있자니 내 입장에선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했다. 매 회마다 이런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면 당장 떡볶이를 먹을 도리가 없는 시청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나는 열혈 시청자로서 이러한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떤 행동이든 취해야 했다. 내가 생각한 최선의 선택은 프로그램에 최대한 몰입하는 것, 현지인들의 마음을 몸소 느끼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말마다 시청 시간에 맞춰 핫도그와 떡볶이를 주문했다. (누군가는 이 조합을 핫떡이라고 부른다는 걸 새롭게 알았다.) 행동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맛있는 걸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수 있다니. 참으로 오랜만에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봤다. 주말마다 부지런하게 '핫떡'을 보고 먹으며 주방 서랍 속 젓가락 개수보다 더 많은 핫도그 꼬치들이 쌓일 즈음 <서진이네>는 종영했고 비로소 나는 이 루틴을 멈출 수 있었다.


나는 TV를 없애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어떤 엄마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TV 없는 집'을 결심한다는데, 우리 집은 사정이 달랐다. 스트리밍 채널이 발달하면서 대부분 태블릿 PC나 휴대폰으로 각자 원하는 영상을 시청하는 게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우리 집 TV는 바빴다. 나는 먹는 것만큼이나 TV를 좋아했다. 먹는 동안 TV를 보기 시작, 더 먹을 것을 가져와 그걸 다 먹는 동안 또 TV를 보는 무한 굴레였다. 누가 들으면 TV에 얽힌 남다른 사연이 있는지 기대할지도 모르겠으나 사실 그저 낡고 볼품없는 TV일 뿐이었다. 10년 전 혼수용 가전을 고를 때 압도적인 화면 크기(사무실에서 쓰는 보조 모니터보다 살짝 큰 42인치)와 파격적인 가성비(실속형 IPTV여서 채널이 많지 않음)에 반해 구매를 했다. 어느덧 남편과 아이는 휴대폰으로 각자 취향껏 영상을 감상했고 결국 TV를 보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남다른 애정의 비화는 이게 전부지만, 나의 전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녀석을 포기해선 안될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나는 집에서 쉴 때면 휴대폰을 보는 대신 TV앞에 앉는다. 휴대폰을 보는 순간, 이래도 안 볼 테야?-하며 내 취향을 꿰뚫은 알고리즘의 지뢰밭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추천 영상들에 붙잡히고 말 테니까. 그것은 마치 나를 위해 거하게 준비된 코스요리를 주는 대로 꾸역꾸역 받아먹는 기분이었다. 그에 비해 TV는 내가 입력한 채널만 출력하니 머리 아플 일이 없었다. 리모컨으로 이것 누르고 저것도 누르며 변덕을 부리는 것도 소소하게 철없이 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사실 허영을 부리자면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화면에 돌비 사운드를 장착한 스피커로 감상하고 싶지만 10년 넘게 녀석을 바라보며 웃고 울었더니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선명도나 원근을 출력하는 기능이 떨어져 축구 경기를 보려면 공이 골대로 들어간 건지 나간 건지 재차 확인해야 했지만, 음식만큼은 확실히 맛깔나게 표현한다고 자부했다. 실제로 나는 화면 속 멕시코의 화창한 하늘을 보며 강릉 하늘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라면을 처음 먹는 현지인의 표정과 그 맛은 화면을 뚫고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었다. 게다가 먹는 장면 속 알 수 없는 소리들(예를 들면, 츄르릅, 쩝, 커어, 등등)은 스페인어를 몰라도, 자막을 보지 않아도, 미각을 품은 채 나의 코와 눈과 귀로 흘러 들어왔고 그것을 보고 있는 나는 이미 그들의 식구였다. 42인치의 화면은 밥을 먹으며 외면 세상을 만나는 가장 큰 창문이었고 누군가를 위해 정성껏 마련된 밥상으로도 충분히 선명했다.


42인치 화면은 제 몫을 묵묵히 해냈기에 더 이상의 사이즈업 없이 그대로였지만 내 허리 사이즈는 그렇지 않았다. 1년 사이 무려 3인치가 늘었다.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은 날, 나는 예상하지 못한 숫자에 당황하여 실수로 결과를 공개하고 말았다. 낙담한 나의 뒤통수를 가엾게 여긴 아이는 나를 대신하여 친절하게 결과지를 소리 내어 끝까지 읽어주었다. 그리고 내게 묻기 시작했다. 엄마, 3인치는 몇 센티야? 고위험군이 무슨 뜻이야? 순간 나는 두려웠다. 아이의 입으로 들은 숫자들이 경고의 눈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다짜고짜 TV를 탓했다. 저것만 없었어도 내가 그렇게 철없이 먹진 않았을 거라고.


나는 공감을 얻고자 이런 잠정적 결론을 주변에 이야기했다. 그러나 다이어트 중인 동료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단연코 TV와 분식에겐 죄가 없다고. 그들이 지적한 부분은 내가 밥을 먹을 때 '무엇'을 보느냐-였다. 무엇을 보는지에 따라 식욕이 오르거나 되려 떨어지기도 한다고. 가령, 식당 손님의 반응을 관찰하는 예능 대신 건강 문제를 심도게 다룬 다큐멘터리(이를테면 <현장르포, 배달 음식과의 전쟁> 혹은 <나는 몸신이다> 등등)를 본다면 덩달아 나의 건강을 염려하게 되어 식욕을 잃을 거라는 전략이었다. 나는 그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TV를 치우지 않아도 될 뿐만 아니라 건강을 돌보는 일반인들의 실제 사례를 보며 제대로 정신 차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김에 채널을 고르기 시작, 고심 끝에 내가 선택한 방송은 <KBS생로병사의 비밀>이었다.  


채널 '다시 보기'를 눌러 들어가 보니 간판 다큐멘터리 채널답게 건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고혈압, 당뇨, 관절, 감염질환부터 정신질환까지, 건강검진표에서 보고 지나간 질환들은 이미 한 번쯤 출연했던 것 같았다. 몇 회차부터 볼까. 회차 정보를 훑어보는데 제목들이 심상치 않았다. 소리 없는 살인자, XXX와의 전쟁, □□의 경고, XXX의 은밀한 함정. 썸네일 속 풍경은 일반인들을 자연스럽게 찍은 듯하여 이질감이 없는 반면, 당장이라도 큰일이 난 것 같이 엄중하고 무시무시한 글씨체로 내건 헤드라인이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아주 자극적이고 좋군. 나는 일단 만족했다.



일단 큰 기대 없이 한 회분만 보기로 했다.  


사연의 주인공은 간이 센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밥과 밀가루를 좋아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날엔 맵고 짠 음식을 즐긴다고 했다. 주인공의 건강 상태를 살펴본 의사는 객관적이면서 단호하게 경고했다. 이대로 계속 드시면 알고 계신 성인병들 중 어느 하나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그 자리에서 고혈압을 진단받은 주인공은 짠 음식을 끊기 위해 조리법과 식단을 바꿔 나갔다. 나 역시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기에 주인공의 상황이 유독 안쓰러웠다. "그래도 고혈압은 무서운 질병이니 이겨 내야 해." 나는 가까운 미래의 나에게 말하듯 영상을 향해 말했다. 희망적으로 일과를 이어 나가던 주인공은 별안간 저녁 반찬으로 떡볶이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취재진을 향해 웃으며 한 마디 하는 말이, 매운 음식이 원래 좀 짜다고. 그러더니 밥에 떡볶이를 곁들여 먹는데 젓가락질이 예사롭지 않았다. 잘 먹는 사람들은 대부분 (먹는 법을) 잘 배운 사람들이었다. 에구구, 저러면 안 되는데.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얼굴을 찡그리며 주인공을 노려보았다. 잔소리를 한마디 더 내뱉으려는 찰나,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야무지게 떡볶이를 집어 먹는 모습에 내 손도 젓가락을 찾는 듯 근질근질했다.  


정신이 나간 게 분명했지만 고혈압 환자의 떡볶이를 탐낸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주인공이 떡볶이 국물에 밥을 비벼 먹을 때 참 야무지다고 감탄한 것도 사실이었다. 지긋지긋한 식탐은 생로병사의 비밀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주인공이 밥 한 공기를 말끔히 해치울 때 덩달아 쾌감을 느꼈다. 너무 몰입하여 본 탓일까. 맛있어 보였던 떡볶이의 조리법이 궁금했다. 혹시 몰라서 해당 회 차를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상세한 조리법은 찾을 수 없었지만 꽤 많은 시청자들이 그 떡볶이를 기억하며 댓글을 달아 놓았다. 나만 궁금한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댓글 중 하나에 '좋아요'-를 눌렀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울할 때마다 이 영상을 보러 와요. 떡볶이를 너무 맛있게 드셔서 저도 같이 행복해져요.'


건강 다큐 충격 요법은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입맛은 그다지 줄지 않았고 오히려 밥상 다큐가 체질이 아닐까 새로운 가능성을 키우며 비슷한 종류의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밥상 곁을 지키며 그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남이 먹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허기와 달랐다. 그들이 누리는 먹는 즐거움을 온전히 계속 이어나가길 바라는 마음과 그런 행복이 나와 다른 이들에게 닿기를 바라는 거룩한 인류애였다. 물론 허리둘레 1인치만 줄이고 나면 나도 모조리 다 먹어버릴 거라는 기약 없는 주문과 죄 없는 떡볶이를 노려보며 입맛을 다시는 애잔함은 덤이었고.

 

결국 입맛을 떨어뜨리는 네거티브 전략은 그만두었다. 오히려 TV 앞에서 더 제대로 차려 먹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일을 더 진심으로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과정을 알고 있다. 그것은 부지런하면서도 최선을 다하게 되는 밝은 열정이었다. 나는 무작정 맛있어 보인다 싶어 충동적으로 음식을 주문하던 습관 대신 먹고 싶었던 음식을 미리 생각하며 준비했다. 고혈압 특집을 본 날은 담백한 메뉴를, 방부제 특집을 보고 나면 유기농 식단을 찾아보며 새로운 메뉴를 만났다. 천천히 고민하여 정한 주말의 특식으로 나는 서툴지만 스스로의 취향과 건강을 돌보는 기적을 실천 중이다. 행여나 42인치 속 타인의 메뉴가 탐이 나도 괜찮다. 허리에 빼앗긴 3인치를 고스란히 반납하는 상상을 하며 타인의 황홀한 순간을 열렬히 축하하고 다음 주말의 메뉴로 잘 기억해 두면 되니까. 다음 메뉴가 쌓일수록 설렘도 늘어나니 어찌 좋지 아니한가.

이렇듯 다이어트는 해야 하지만 핫도그가 먹고 싶을 때, 성인병 걱정 없이 살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을 때, 나는 TV 앞에 앉는다. 오늘도 나와 당신의 안녕한 밥상을 기대하며.



출처: KBS 생로병사의 비밀



배경그림 출처: Pixabay, reh0714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네가 싫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