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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아래 May 08. 2020

그러니까 도대체 니가 말하는 트레킹이 뭐야?

<나는 살고싶다.>

트레킹. Trekking. 포털 사이트에서 정의를 찾아보면 "산의 정상을 오르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산의 풍광을 즐기는 여행의 한 형태"라고 한다. "전문적인 등산 기술이나 지식이 없이도 즐길 수 있는 행위"라고 한다. 오예~!


그런데말이다... 예전에 읽었던 어느 신문의 사설에서는 해외에서 직장생활중인 필자가 '취미가 뭐냐는 외국 동료의 질문에 '트레킹'이라고 답하자 그 동료가 매우 놀라며 자신도 그렇다며 언제 같이 가자고 하는데 완전 전문적인 산악장비를 가지고 와서 고산등반을 하더라'하는 글을 읽은 일이 있다.


물론 나라마다 지역마다, 개인마다 그 단어가 내포한 뜻이나 느낌이 다 다르겠지만 여하간 그 글의 논지는 '트레킹'이라는 단어가 한국과 외국의 쓰임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4,300km의 트레일인 PCT(Pacific Crest Trail)를 비롯하여 세계 여러 트레일을 걷고 또 여행한 국내의 하이커도 그 구분에 대해 난색을 표했다. 다만 그도 어디에선가 들었다 하며 그 구분을 들려주었다. "체력 좋은 일반인이 전문적인 장비가 없이 자력으로 오를 수 있는 구분을 약 5,000m로 잡는다고 하더군요. 딱 그 경계가 되는 것이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라고 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래서 그 정도 산을 오르는 것이 하이킹, 그 이상의 고도의 훈련이나 전문적인 지식과 장비가 필요한 것은 트레킹이라고 인식하더라구요."


무언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으니 아리송하다. Trek.is(http://trek.is)에서는 고도와는 상관없이 하이킹과 트레킹을 구분한다. "거친 자연에서 여러날을 보내면 트레킹이고 자연속에서 당일 혹은 1박2일 정도를 걸으며 즐기는 것은 하이킹이다." 


한국트레킹학교의 윤치술 교장은 "산 아래를 걷는다면 워킹, 산을 조금 올라간다면 하이킹, 그 너머는 트레킹"이라고 한다.


점점 머릿속이 복잡해지려 할 때, 만인의 구세주인 '구글'과 세상 백과사전들의 우두머리격인 캠브릿지 영어사전의 트레킹에 대한 정의가 내 가슴에 가장 강렬하게 박혔다.


Google 사전 : 여러가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오랫동안 걸어서 하는 여행
캠브릿지 영어사전 : 긴 거리를 발로 걷고 즐기며 기쁨을 누리는 행위


그래 이거면 된다 싶다.


어차피 걸어서 하는 여행, 그것도 길게 걷는 여행이다. 


어디를? 길을.


그 길을 걷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높이나 거리, 난이도가 그 무엇이 중하겠는가. 결국 그 길이 산의 정상을 향해 있다면 그렇게 오르는 것이고 정상 너머로 길이 이어져 있다면 그렇게 걷는 것이다. 걷다보면 그 길을 가기위해 밧줄을 잡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어쩔 땐 '해발'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높이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표현한게 트레킹이다. 즉 트레킹은 그게 어떻게 생겨먹었던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심지어는 없는 것을 자기가 만들어가더라도 '길'을 오랫동안 걷는 것이다. 

<아주 숭악하게 생긴 길>

나름 길 여행 뉴스에서 기자라는 직함으로 글을 쓰면서도, 전국의 다양한 길을 걷고 또 걸으면서도,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고 걷기 행사를 열면서도 내 마음속에 항상 가지고 있는 의문, 짜도 짜도 그 뿌리가 남아있는 '불휘기픈 뾰루지'인 그 트레킹의 의미를 그렇게 정리했다.


사실 굉장히 머리가 아프고 복잡한 작업이었다. 무언가 실체를 분명 알긴 하는데 구체화 하기가 힘든, 주관적 느낌과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다양한 객관적(이라면서 각각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상당한) 정의에 대해 '구글'과 '캠브릿지 영어사전'을 마치 석판을 겨드랑이에 낀 모세처럼 방패삼아 나름의 논리를 정당화 하였다.


물론 붙일 말은 더 있다. 역시 여기에는 약간의 '고수 아닌 고수'같은 느낌과 무언가 득도의 세계에 빠져 마주한 사람의 눈 너머 어딘가를 보는 듯 한 뜬구름 어법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뭐 그리 중요하나요. 결국 얼마나, 어디를 걷느냐 보다 걸으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중요하지요."


약은 이 정도 팔면 되리라.



그런데 사실 그 말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길을 걸으면서 무엇을 느끼는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어떠한 수치적 목표를 가지고 걷는 것에는 사실 크게 공감하지 않는다. 시작지점과 도착지점까지의 거리를 km로 환산하고 심지어 그 거리까지 '남들은 몇 시간이 걸렸는데 나는 이만큼이나 빠르다' 같은 경쟁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개인적으로는 소름끼칠 정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반드시 정상을 오르고 정상석에서 인증을 해야 하는' 등산이 나하곤 잘 안맞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그 길 위에 정상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지나쳐 가는 것이고 혼자 걷는 대부분은 정상석을 찍지 않고 잠시 그 밑에 앉아 시원한 물이나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다음 길을 생각하는게 일상이기 때문이다.

<산을 올라 저 멀리 능선 끝의 철탑에서부터 걸어왔다.>

또한 '인생의 방향'이나 '삶의 가르침', '정신적 카타르시스', '육체와 영혼의 거듭남' 등 점점 광대하게 커지다 못해 어디 인도의 구루 뺨 칠 정도의 깨달음을 구체적 목표로 정하는 걷기도 싫어한다. 그것은 걷기 자체가 깨달음에 대한 '자기학대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일 뿐더러 대부분의 경우는 '깨달음'이 아닌 '자기부정'이나 '깨달음'을 빙자한 '자기타협'으로 끝나는 경우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저 걷는다, 그 자체 만으로도 얼마나 즐거울 수 있고 환희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가? 나는 내 몸을 이끌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약간의 야산이 가미된)10km를 걷고도 충분한 만족도를 느낄 수 있고 복잡한 머리를 정리할 수 있었다. 


'오늘 내 머리를 괴롭히는 이 문제에 대해 걷는 동안 확실히 해결하자!" 같은 목표를 세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복잡한 상태에서 인적이 드문 뒷동산과 강변을 걷는 것 만으로도 나도 모르는 내 두뇌는 나름 주판알을 굴리며 일회성, 당일이용권에 불과하지만 답변을 출력하여 머릿속에 입력해주었다.


나는 그게 놀라웠다. 


하다못해 매일처럼 걷는 그 길에 그저 점점 더해가는 녹음만 보여주고 올라가는 기온에 점점 더해가는 내 몸의 육즙만 늘려주더라도 집에 도착해 그 땀을 씻는 행위나 집 앞의 편의점에서 시원하게 마시는 청량음료, 스포츠 음료의 만족감을 통해 다시 몸의 활력을 끌어올렸고, 근거없는 자신감(대부분 아주 약간의 수분이 줄어든 체중)을 심어주고 두뇌에 자극을 주었다. (문제는 언제나 자극에 둔감한 내 두뇌가 문제인거지.)

<동네 뒷산의 산책로가 얼마나 멋진 카운셀러가 되어주었던가...>

심지어는 제발 좀 일하라고 자극을 줘도 '사실 난 두부라네' 정도로 존재감 없던 내 두뇌가 숲길을 걷는 동안 시키지도 않았는데 '맞아, 잊고 있었던 그 문제, 그거 어떻게 해야하지...'하고 끄집어낸다. 그리고 대부분은 '별거 아니야. 들어가서 생각하자.'같은 심드렁한 반응으로 끝나지만 그렇게라도 다시 상기시키고, 또한 별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 있을 정도로(실제로도 그런 문제들인 경우가 많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게 이렇게까지 고민할 부분인가? 같은...) 가볍게, 자신있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놀랍게도 아무리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바라보아도 생각나지 않던, 잊고있던 것들이 길 위에서는 두더지 게임의 공산당 두더지처럼 솟아오르고 시원하게 망치를 맞고 들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걷기가 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자극에 중독이 되면 다음에는 어쩔 수 없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간다. 


'그나저나 뒷동산은 이제 질리게 걸었는데 다음엔 어디를 걷지? 얼마나 걷지? 좀 멀리 나가볼까? 여행겸?'


당신이 이런 생각을 할 때 바로 등 뒤에서 시뻘건 악마가 -특유의 삼각형 추가 달린 듯한 꼬리를 흔들고- 플랜카드를 들고 있는 것이다. 


"트레킹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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