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드니까 좋아. 지나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PD생활을 하며 만난 유일한 연예인이 점심을 사주며 말했다. “맞아 맞아!” 옆에서 마흔이 넘은 선배 B가 맞장구를 쳤다. “나는 그래서 너네 보면 좀 안쓰럽기도 해. 지금부터 딱 고민이 엄청 많은 나이거든. 헤쳐나가야 할 게 엄청 많아.” 연예인 선배(연선배라 칭하겠다)가 말했다. 연선배는 50대, 나는 20대, 다른 선배 A는 30대, 선배 B는 40대였다. 연선배는 내 입봉작을 같이 해준 선배다. 이 프로그램을 이제 나가게 되었다고 말하자, “잘했어! 네가 이 어려운 프로를 해낸 거야! 잘 견뎠어!”라고 말해준 선배였다. 정확히 그때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어려운 아이템을 할 때면 또 그에 맞는 응원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그 나이에 맞는, 그 시기에 맞는, 필요한 말을 딱딱해주는 그. 신기가 느껴졌다.
“큐마야, 너 인생 괜찮을 거야.” 언젠가 명절에 외할아버지가 나에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나와 같은 회사에서 평생을 언론인으로 사셨다. “내 인생, 괜찮았거든. 나름. 그니까, 너 인생도 괜찮을 거야.” 여든이 넘은, 그리고 나와 가장 닮은 어른의 한 마디는 오래 남았다. 자신과 가장 비슷한 손녀가 비슷한 길을 걸어가는 걸 보며 해주고 싶은 말이었나 보다. 그 길 나름 괜찮다. 잘 가고 있고, 잘 해내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가끔 새벽에 편집실 문을 잠그고, 아무도 없는 회사 로비를 지나, 택시를 기다리며 하늘 위에 뜬 달을 응시할 때 나는 그 말이 떠올랐다. “이게 맞나?” 싶을 때 “응, 그것도 맞아.”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어떻게 되든, 괜찮을 거야. 나보다 먼저 산 클론이 맞다고 했으니까!
20대가 거의 없는 회사에 다니면서, 30대, 40대, 50대의 조언을 무수히 듣는다. 내 나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보다,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의 조언이 더 도움이 된다. 그 나이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람,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는 데 뭐가 힘드냐는 사람보다, 그 나이는 참 힘든 나이라고 나는 좋은 세대에 잘 산 것 같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낫다. 담백한 조언, 혹은 격려를 건네는 사람이 좋다. 혹은, 나의 처음을 축하해 주는 어른들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최근 생방송 연출 입봉을 했다. 나는 이미 아이템으로도 입봉을 하고, 시사 프로그램으로도 입봉을 하고, 이제 생방송 연출 입봉까지! 각 입봉마다 조촐하게나마 나를 축해준 어른들이 귀엽고 고맙다. 수타 짜장면 집에서 아빠 나이의 부장님과 둘이 맥주에 탕수육을 먹으며 나도 후배의 처음을 축하해 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가득 찬 회사에 다니는 장점은, 조언을 구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나는 결혼한 사람에게 모두 “누구와 결혼해야 해요?”라고 묻는다. 주로 누구와 결혼하면 안 된다는 조언이 줄을 잇지만, 누구와 결혼해야 하냐는 질문에 대답을 듣다 보면 꽤나 많은 자산이 생긴다. 앞서 얘기한 연선배는 나에게 무조건 착한 사람이라고 했다. 너에게만 잘하는 사람 말고, 종업원에게도, 약자에게도 잘하는 사람. 배어있는 배려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어야 네가 나이가 들어도 쭈그렁 할머니가 되어도 너를 당연하게 업고 병원에 가줄 거라고. 와! 그런 태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던 나에게는 꽤나 사이다 같은 말이었다. 사람을 무는 도베르만 말고, 골든 레트리버를 만나라고 했다. 좋은 말이었다.
최근 시간이 아주 빠르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벌써 5월, 사회생활을 시작한 2년은 모든 게 슬로모션 같았는데, 이제는 정상 속도를 지나 꽤나 빠르게 세월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지난 2년 동안 나는 그 전과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인간은 바뀌지는 않지만 계속 성장하는 존재다. 30년 뒤, 40년 뒤, 60년 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일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삶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 생각해 본 것 같다. 일에 대해서는 프로일지라도, 삶에 대해서는 아마추어다. 아마 계속 아마추어일 테다. 어찌 되었든 부단히 고민하고 꿈꾸며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어렵게 한 해 한 해 쌓으며 살아왔는데 6월부터 다시 한 살이 줄어든다 한다. 젠장. 내 나이가 줄어든다는 안도감보다도 쌓아온 것이 하나 사라진다는 허무감이 있다. 나이가 든 나는 무엇을 만들고 있을까? 누구를 만났을까? 조금 궁금해진다. 아무쪼록 좋은 어른이 되었길 바란다. 연선배처럼 여유 있는 어른이 되어 주변에게 맞는 조언을 해주며, 내 주변을 지켜주며 살고 싶다고 속삭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