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마저 불편하고 싶지는 않다
요 며칠 글을 쓰는 일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실컷 적어놓고 날리고, 발행을 앞두고 지워버리고, 몇 자 적었다가 다시 지워버리곤 했다. 그렇다. 글이 잘 안써지는 것이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글은 원래 잘 안써졌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놀랐던 사실은, 내가 무언가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 글을 읽어주는 당신들일까? 아니면 나 스스로 키워낸 비대한 자아일까.
어쨌든 눈치를 없애는 데는 수치심이 최고다. 지난 1년 간 인스타에 꾸준히 글을 올렸다. 수치심을 연습하기 위해서. 내 글에 대한 질책도, 칭찬도 거르지 않고 듣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비난보단 칭찬이 많았다. 이건 내가 글을 잘썼다기보단 사람들이 그래도 착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사람들은 칭찬을 더 쉽게 한다. 비난은 후폭풍이 두렵기 때문이다. 칭찬엔 비용이 없지만, 비난에는 비용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 나한테 하는 비난은 복리로 적용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브런치도 실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딱히 공개는 안했지만, 찾다 보면 내 소속도 금방 알 수 있다. 개인정보가 돌아다닌다는 건 너무나도 두려운 일이지만, 딱히 숨길 수도 없다는 데 동의하기로 했다. 이미 중국에서는 내 이름과 주민번호가 돌아다니지 않을까? 농담삼아 이야기 했던 것들이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느낀다. 최근 학폭 이슈로 인해 하차한 연예인들이 많은데. 그것과 같다고 느낀다. 내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나도 분명 털릴 수 있고, 나의 기록이 세상에 공개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결국 나는 떳떳하게 사는 일 밖에 할 수가 없다. 물론 이 또 한 해석의 여지가 있는 말이지만, 도덕까진 못지키더라도 법만큼은 꾸준히 지키는 게 유일한 답이라고 느낀다.
그런 면에서 찌질함을 쓰는 것은 상대적으로 편하다. 애초에 기대를 낮춰버리니까. 도덕을 그려보자면 고무줄 같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널널하게 작용하고, 누군가에겐 타이트하게 조여져버리니까. 정확히 말하면 벨트 같은 것일까. 기대가 높은 사람에게는 조금 더 빡빡한 기준을 대게 되는 것 같다. 츤데레가 유행했던 시절에도 그런 느낌이 많았다. 순하고 선한 사람들에게는 배신감을 느끼고, 틱틱대던 사람들에게는 의외의 반전을 느끼는 게 사람이니까. 기대를 낮추면 글을 쓰는 일도 편하다. 이 글은 기대감을 더럽게 낮춰버리는 글이다.
조금 더 드러내고 싶고, 조금 더 무너지고 싶다. 조금 더 못나서 조금만 잘해도 더 티나고 싶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모자라고 대부분의 상황에서 부족하게 보이고 싶다. 가끔 잘해도 자주 잘해오던 사람보다 빛날 테니까. 주로 짜증내고 무관심하다가 어쩌다 관심을 보내고 싶다. 계속되던 관심은 오히려 끊겼을 때 서운함으로 변하니까. 대충 그런식이다. 내 생각은. 그러니까 나는 결국 찌질함을 쓰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