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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Jul 24. 2024

초대장

아버지를 위한 영화제

아버지를 위한 영화제를 꾸리기로 한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아버지가 떠오르는 영화들을 모아 기억의 빛으로 심장에 영사하는 영화제를.

     

아버지는 내게 영화를 좋아하는 DNA를 물려주셨다. 누군가는 영화평론가나 영화감독, 교수나 제작자의 아들딸일 수 있지만, 나는 그저 영화를 좋아하는 평범한 사람의 딸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딸인 것이 자랑스럽다.


아버지는 영화를 좋아하셨지만,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극장에 간 기억은 없다. 어머니가 잔인하거나 무서운 것을 못 보시기에 영화 보기가 가족 모두의 취미가 될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직장 발령에 따라 유치원 다닐 무렵부터 초등학생 때까지 몇 년간 극장이 없는 지역에서 살았다. 영화와 거리가 먼 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처음 비디오를 접한 시기도 그보다 발달한 인접 도시로 주거지를 옮긴 초등학교 고학년 이후였다.      


아버지와 영화관에 간 기억은 대학생이 되고 난 뒤, 딱 한 번뿐이다.

아버지와 극장에 간 적이 없다는 사실을 문득 자각했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아버지는 조실 때마다 ‘음’, ‘음’ 소리를 내며 잠꼬대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영화관에서 그 소리가 자꾸 나서 아버지를 깨우느라 진땀을 뺐던 기억만 남았을 뿐, 어떤 영화를 봤는지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울산에서 개봉할 정도면 아마 블록버스터 영화 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버지의 극장은 집이었다. 고모가 아버지가 예전에 보던 비디오테이프를 잔뜩 갖다주면서 어느 날부터 못 보던 비디오테이프들이 생기긴 했는데, 그중에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비디오는 없었다. 어떤 비디오테이프인지 기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비디오테이프는 언제부턴가 사라졌고, 내 기억 속에도 남아 있지 않다. 아버지가 그 비디오를 보신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내게 실질적인 영향을 준 존재는 아버지보다는 언니였다. 언니와 함께 <레드 핫> <마이걸> 등 비디오테이프를 자주 빌려보곤 했는데 그럴 때도 아버지가 무언가를 추천해 주셨던 기억은 없다. 직장 생활하시느라 늘 바쁘셨기 때문이었을 거다. 아니면 조심스럽거나 어려워하는 마음 때문일지도....


아버지는 주로 TV에서 방영하는 영화들만 보셨다. <벤허>나 <빠삐용> 혹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같은 영화들을 감탄하면서 재미있게 보시곤 했다. 너무 자주 방영하기에 본 것 같지만, 막상 제대로 본 적은 없는 것 같은 영화들이다.

당시로서는 그저 평범한 영화들이었기에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긴 했지만,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직한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원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하면서, 연극을 하려 했을 때보다 더 나의 평범함에 좌절했다.

아핏차퐁의 <열대병>을 퀴어의 맥락에서 비평했다가 '퀴어영화 별로 안 보셨나 봐요'라는 코멘트를 받았고, (사실이었다. 혼자 학교 화장실에 처박혀 한참 울었다) 제도권 교육을 박차고 나온 누군가가 나의 초등학교 시절 인생영화였던 <죽은 시인의 사회>를 혐오하는 것을 마주한 이후로 '죽은의 '자도 꺼내지 않았다. 나의 그 모든 근본 없음이 부끄러웠다.


영화와 글쓰기는 내가 뒤늦게 대학원 공부를 시작한 계기이자 유일한 끈이었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했을 때 글쓰기는 물론 다른 어떤 것에도 재능이 없어 보였다. 심지어 나이도 많았다.

도서관에서 노트 하나 펼친 채 고민을 써 내리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한탄했다. 그래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수업 시간 홍상수 영화에 관해 말하다가 ‘버티는 것들이 문제’라는 대목에 울컥해 갑자기 울어 버려서 모두를 당황하게 만든 적도 있다. 내가 바로 버티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동기는 술자리에서 내게 ‘평범함이 언니의 저주’라고 말했다.  

한 번은 타로점을 봤는데 내가 냉정하게 평가하는 영화평론가라는 직업과는 맞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도 무명한 평론가로 남아있는 것을 보니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의 평론 활동은 아마도 타인의 박한 평가를 지지대로 삼아 평범한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오기를 부리는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내 이야기가 좀 길었다. 긴말을 이어간 이유는 나의 평범함을 인정하는 것이 곧 나의 영화 세계에서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가 평론상을 받으며 데뷔한 뒤 어머니는 영화 좋아하는 것은 아빠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나는 그 말을 그저 흘려들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네가 내 피를 물려받았다느니, 나도 영화를 좋아했다느니 그런 말들.

그저 홀로 안방에서 영화 채널을 틀어놓고 계셨다. 거실의 큰 텔레비전 대신, 작은 안방의 모니터로. 때로는 앉아서 때로는 옆으로 기대 누운 채로. 가끔 엄마의 면박이 떨어질 때면 다른 채널을 보기도 하시면서.... 그렇게 티 내지 않고....   


내가 평론가로 등단한 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일터 백화점 별관 3층에 있던 서점에 가끔 들러서 혹시 딸의 글이 실렸는지 잡지 코너에서 <씨네21>을 들춰보곤 하셨단다. 하필 <아가씨> 비평을 썼던 호를 찾아보셨고, 조금 어려웠다는 평을 들려주셨다.

그 후 아버지도 재미있게 읽으실 비평을 쓰고 싶었지만, 마감에 쫓기다 어느 순간 잊었고 아버지가 즐겨 들렀던 서점도 전자제품 매장으로 바뀌면서 사라졌다.       


•••


어머니가 주변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전했을 때, 모두 놀라고 안타까워하면서 참 좋은 분, 참 착하신 분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아빠가 우리에게 화낸 적이 있다고 말하면 친척들도 놀랄 정도였다.

누군가 아버지를 일컬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했다.

뒷돈이 횡횡했던 그 시절에 돈을 받지 않은 (아마도 유일한) 사람이어서 누군가에게 각인된 이가 바로 나의 아버지다.

그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이모부의 지인이 되어 그 이야기가 가족들 사이 퍼지면서 아버지의 별명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되었다.  

그런 아버지에게 돌아왔던 건 결국 명예퇴직이었다고 해도, 아버지로 인해 누군가의 세상이 조금 덜 나빠졌으리라 믿는다.       


그런 아버지의 고지식하고 올곧은 성미는 영화에 관한 생각을 정립하기 이전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참고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으로 내게 변형 상속되었다.  

그런 강박이 결과적으로 나의 데뷔를 늦췄고 여전히 내가 헤매는 이유라 해도,

그 평범한 수난이 나의 세계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믿고 싶다.

 

티 내는 걸 좀처럼 싫어하셨기에

나의 이 시도도 아버지께서 달갑게 여기실 것 같지는 않다.

학창 시절 내 일기장을 훔쳐보는 걸 좋아하셨으니

지금도 어딘가에서 이 글을 보고 계실 것 같다.

부디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는 것을 용서해 주시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 연락처 목록에서 연락할 사람이 거의 남지 않았음이 서글펐다.

프리랜서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내겐 동료조차 없다.

함께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다는 사실에 초조했다.

아버지를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으면 했다.

그 순간이 한이 되어 지금 이 글을 쓴다.


심지어 자식에게조차 제대로 말한 적 없던,

수줍은 시네필이셨던 나의 아버지께

여기에 쓰일 나의 글과 타인이 만든 아버지의 영화들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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