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매튜 아저씨
[opening]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
대학생이 된 이후 서울에 살게 되면서 서울과 울산을 오가게 되었을 때, 아버지는 늘 정류장이나 역까지 바래다주시거나 데리러 오셨다. 한동안은 동서울터미널을 이용해 서울과 울산을 오갔지만, KTX가 정착된 이후에는 서울역을 이용하게 되었고, 아버지는 울산역이 있는 언양까지 먼 길을 마중 나오셨다. 아버지는 늘 일찍 나와 계셨다. 어떤 때는 한 시간 정도 일찍 나와 기다리기도 하셨다. 그러지 마시라고 말씀드려도 늘 일찍 서두르셨다.
나는 아빠가 영화를 좋아하신다는 사실보다 운전을 좋아하신다는 쪽을 더 확신했다. 어느 날 형부가 “운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단언하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쩌면 아빠가 운전을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우리를 위해서 좋아하는 척하셨을 수 있다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이후 “아빠, 힘드시면 안 나오셔도 돼요.”, “그냥 셔틀버스 타고 갈게요.”라고 말씀드리곤 했지만, 아버지는 ‘아빠의 낙’이라며 한사코 먼 길을 오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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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는 법이 없으셨던 아버지와는 달리 <빨강머리 앤>에서 매튜는 앤과의 첫 만남에서 늦고 만다. 시계가 고장 난 것을 모르고 여유를 부린 탓이다. 그 덕분에 앤이 고요한 가운데 매튜 아저씨를 기다리며 근처에 아무렇게 놓인 포댓자루를 의자 삼아 앉거나, 기찻길을 걷는 한가로운 순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매튜의 지각은 앤이 초록색 지붕 집에 살게 되는 결정적인 전제이기도 했다. 만약 매튜가 제시간에 도착했다면 스펜서 부인이 착오가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곧장 앤을 데리고 떠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매튜는 앤과 함께 마차를 타고 가면서 앤에게 마음을 연다. 앤을 다시 보육원에 데려다주려던 마릴라 역시 앤과 마차를 타고 가는 시간 어딘가에서 마음을 바꾼다.
수다를 쉬지 않는 앤과는 달리 나는 좀 무뚝뚝한 딸이었다. 오가는 차 안에서는 짧은 대화와 긴 침묵이 흐르곤 했다.
내가 타는 자리는 늘 정해져 있었다. 보조석 뒷자리다. 시간이 흐른 뒤 보조석 뒷자리가 상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옆자리에 타려고도 했으나 아버지는 늘 편하게 뒷자리에 타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어딘가 매튜 아저씨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구부정하고 느릿한 동작과 속마음을 표현하는 데 서툰 점이 그랬다. ‘매튜’라는 캐릭터의 이름이 낯선 엄마는 늘 아버지를 ‘앤 할아버지’라고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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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언니는 앤을 사랑했다. <빨강머리 앤>이 방영되는 날 아침, 등교하는 언니 대신 빈 비디오테이프를 넣고 녹화 버튼 위에 손을 댄 채 기다리던 순간의 설렘은 평일의 일과이자 큰 기쁨이었다. 녹화했던 비디오테이프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설사 비디오가 있다고 해도 재생할 플레이어도 없다. 이제는 넷플릭스를 통해 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OTT 시스템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비디오를 넘치게 빌릴 수 있다. 누군가가 선점한 비디오테이프가 뒤집힌 채 꽂혀 있을 위험도 없다. 찾던 비디오가 없을 때의 아쉬움과 그보다 더 큰 모종의 동류의식도.
2024년 7월 현재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시리즈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의 오프닝에는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강머리 앤’으로 시작하는 익숙한 주제곡 대신, 원곡을 한국어로 번안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앤이 원래 일본어를 했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앤을 연기한 정경애 성우의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착붙'이다. 그건 매튜 아저씨나 마릴라 아주머니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새롭게 바뀐 앤과 마릴라, 매튜의 목소리를 마주했을 때는 무척 실망해서 관람을 포기했지만, 최근에 다시 보며 새로운 목소리에도 마음을 열기로 했다.
나는 앤을 좋아한 나머지 앤의 목소리를 흉내 내곤 했다. 여자아이는 필요 없다는 사실에 절망해 울음을 터뜨리던 앤이 이름을 묻는 마릴라의 질문에 갑자기 눈물을 닦고는 말했던, “코오딜리어라고 불러주세요”에서부터 “소문자 e가 붙은 앤으로 불러주세요.”까지의 일련의 대사가 나의 전공이다. 박명수가 진행하는 라디오의 요일 코너 '성대모사의 달인'에 나가보라는 주변(1명)의 이야기도 들었지만, 아직 시도해 보진 않았다. 박명수는 가족 빼고 한 명 이상에게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 도전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내가 가족 이외의 사람 앞에서 앤의 성대모사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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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의 초반 에피소드를 담은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 <빨간머리 앤 : 그린 게이블로 가는 길>이 2013년 개봉하면서 극장에서 앤을 다시 만났다. 예전에는 온통 앤에게만 초점을 맞췄다면 점점 다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 버전에서는 유독 매튜 아저씨의 모습이 마음에 남았다.
앤은 하루 사이에 초록색 지붕 집을 둘러싼 모든 것에 정이 들었지만, 총대를 멘 마릴라가 모는 마차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만 한다. 그 사이 앤에게 정이 들고만 매튜는 “그 아이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라는 마릴라의 말에 “반대로 우리가 저 아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해 마릴라를 놀라게 한다. 그래도 마릴라의 고집을 끝내 꺾진 못한다.
침울하게 앉아 있던 앤은 마차가 문밖을 나서기 시작하자 몸을 돌려 자신이 이름 붙였던 모든 것들에 작별을 고한다.
“잘 있어 보니, 잘 있어요 눈의 여왕, 아저씨 안녕히 계세요.”
그 장면에서 마음이 저릿한 건 어쩔 수 없다. 애써 인사하는 앤의 해맑음도 눈물겹지만, 앤이 탄 마차가 점점 작아지다 사라지자, 갑자기 매튜가 뛰기 시작하는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건 극 전체를 통틀어 매튜가 달리는 유일한 모습이다. 고작 몇 걸음뿐이지만, 매튜에게 그 걸음은 수천 km를 의미한다. 그의 달리기를 목격하게 된 우리에게도… 매튜는 한참 그 자리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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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가 달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가족들이 함께 공원에 산책하러 가면 아버진 늘 저만치서 쉬엄쉬엄 걸어오셨다. 이따금 내가 꽃이나 오리, 나무, 하늘, 호수 같은 풍경을 찍다가 뒤처지면 아빠와 만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소희가 사진을 찍으니까, 아빠랑 속도가 맞네”하며 빙긋이 웃으셨다. 그렇게 멀어졌다 또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왜 그때 아빠와 속도를 맞추지 못했을까.
아빠가 서둘러 나오시거나 서둘러 가려고 하신 이유는 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뛰기는커녕 보통의 속도로 걷는 것조차 아버지에겐 무리였다. 앤을 향해 뛰던 매튜처럼 아빠가 뛰는 장면을 가끔 상상한다. 그 모습은 아무래도 어색하고 낯설다. 아빠가 뛰기를 소망하셨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숨찬 느낌 없이 걷기만을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아빠의 달리기는 이제 나의 소망이자, 안타까움일 뿐이다. 아빠가 만약 달리고 싶으시다면 마음껏 달릴 수 있기를, 무거운 산소통도 거추장스러운 줄도 마스크도 없이…
PS. 차이밍량의 <행자> 연작 중 10번째 작품인 <무소주>를 통해 이강생의 지속하는 느린 발걸음을 오랜만에 다시 접하면서 속도의 상대성에 관해 생각했다. 어쩌면 이제 아버지가 계신 곳은 빠름과 느림이라는 속도 체계를 초월한 곳일 거다.
세상에 존재했던 아빠의 걸음도 느림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속도를 지녔을 것이며, 그것을 모두 보았다면 아빠가 뛴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순 없다.
느린 것은 열등한 것이 아니다. 느림을 극단적으로 추구했을 때 그것은 어떤 속도로도 넘지 못할 저항이 된다. 아버지에게 저항의 대상은 자신의 몸이었다. 때때로 저항하거나 굴복하며 살아낸 그 모든 걸음걸음은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가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