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굴러 내려오는 중립들
[pre-cinema]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
2018년 다른 분야의 예술인과 협업 활동을 진행했다. 우리는 각자의 영역을 체험, 창작, 비평으로 정리한 뒤 참여자들이 각각을 순차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워크숍을 기획했다. 체험 분야 예술인이 여행 경험을 바탕으로 전시를 꾸리고, 창작 분야 예술인은 자기 삶을 바탕으로 한 웹툰 그리기를 진행했다. 그런데 비평이 문제였다. 영화 한 편을 정해서 비평을 쓰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겠지만, 그럼 어떤 영화를 선정한다는 말인가. 무엇보다 나는 체험과 창작에서 이어온 ‘자기 삶’이라는 모토를 비평의 영역으로 끌어오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 인생 영화 비평 쓰기'라는 뻔한 기획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무리를 해봤다. 자기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혹은 만들어졌다고) 상상한 뒤 이를 비평해 보는 것이다. 당시 내가 가진 주된 문제의식은 ‘비평은 창작이 될 수 있는가?’였는데, 비평이 영화 창작의 욕구를 추동해 종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를 실제로 만들어내기를 기대했다. 그렇다면 비평은 곧 창작임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
‘아니, 그냥 비평 쓰기도 어려운데, 존재하지 않는 영화에 관한 상상까지 하라고?’
물론 의도는 좋았지만,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너무한 기획이었다. 예상한 대로 모객은 잘되지 않았다. 결국 창작 워크숍에 참여자 중 두 분에, 기획한 예술인들이 참여하는 자체 프로그램에 가깝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비평 쓰기를 참여자에게만 미뤄둘 순 없었기에 매 맞는 심정으로 나 역시 기획자이자 참여자로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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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삶의 조각과 기존 영화에서 채집된 조각들이 부딪치는 몽타주 형식의 영화를 상상했다. 제목은 <깜빡 깜빡이는 희미한>이다. 비평을 작성하다 보니 내가 만든 영화에 관한 일종의 작가의 변 혹은 충실한 설명과 분리하기 힘들었고, 때로는 영화의 명백한 의도의 영역으로 남겨둘지, 비평적 해석 혹은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둘지 갈등했다.
당시 내 삶의 조각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건 기획하던 때로부터 불과 몇 해 전 가족 여행 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 기간을 맞아 안동으로 떠났다. 가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회 마을에 갔을 거라 짐작될 뿐이다. 여행에 관한 기억이 완전히 잊힌 데는 이유가 있다. 여행을 마치고 아빠가 모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가 엉뚱한 길로 들어섰다. 톨게이트 옆으로 난 돌아가는 길을 통해 일단 거기서는 빠져나왔는데 그 뒤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빠져나온 길 근처에 멀찍이 선 공장 건물과 넓은 공터가 보였다. 거기에서 한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버지는 공터에 임시로 차를 세운 뒤 길을 묻기 위해 그 사람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런데 차가 갑자기 앞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깐 길만 묻고 다시 탈거라 생각한 아빠가 브레이크를 중립으로 해놓았는데 하필 공터가 앞쪽으로 묘하게 기울어졌던 모양이다.
차는 계속 움직였고, 낭떠러지가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빠를 제외한 우리 가족은 아무도 면허가 없었다. (엄밀히 말해 엄마는 면허는 있었지만, 그 이후 한 번도 운전대를 잡은 적이 없으셨으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보통 때라면 엄마가 보조석에 앉으셨겠지만, 낯선 여행지였고 그나마 내가 길을 더 잘 볼 거라는 짐작으로 그날따라 보조석에는 내가 타고 있었다. 엄마가 언제 굴러가던 차에서 뛰어내리셨는지는 모르겠다. 생각나는 건 여전히 뒷좌석에는 언니가 타고 있었고, 운전석 열린 창문 밖에서 아버지가 힘겹게 매달린 채 "P"를 외치셨던 사실이다. 내가 어떻게 P모드로 전환했는지 모르겠다. 가까스로 차가 멈췄고, 차에서 내렸을 때 흙바닥에 널브러진 엄마의 겉옷과 가방이 그 순간의 위급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엄마는 빨리 내리라고 외치면서 차에서 탈출하셨다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직 애처롭게 매달린 아빠의 모습과 그 순간 눈에 들어온 ‘P'만이 생생하다. 내가 안 내린 건 그렇다 치고 뒷좌석의 언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리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상한 건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담배 피우던 사람의 존재인데, 그는 누군가가 죽을 위험에 처해 있었는데도 그저 보고만 있었다. 누군가가 위험에 빠졌을 때 몸을 움직여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일까. 영화 속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저 지켜보거나 스치고 지나가는 무심한 행인이 등장하곤 하는데, 영화를 보면서는 웃었지만 사고 당사자에 자기를 대입한다면 누구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거다.
여기에 반전을 기입해본다면 낭떨어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리 깊지 낮은 땅이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 누구도 그 땅의 끝으로 가서 아래를 내려보는 일따위는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둘러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엄마는 딸들이 죽었으면 어쩔 뻔했냐며 여러 번 가슴을 쓸어내리셨다. 다시는 아빠 차로 어디 안 간다는 모진 말도 흘러나왔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우리 가족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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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워크숍을 위해 쓴 비평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서술했다.
“고정숏으로 찍힌 정적인 교감은 이제 핸드헬드로 찍힌 절박한 교감으로 변화된다. 한 자동차 안에서 운전석에 반쯤 열린 창문 뒤에서 한 남자가 거의 매달리듯이 끌려오며 ‘P’를 외친다. ‘P’는 차량을 주차할 때 두는 기어를 의미한다. 운전석은 비어 있는 상태다. 남자는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보조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에게 절박하게 외치고 있다. 아이든, 어른이든 운전할 줄 모르거나 조정이 서툰 사람이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리라. 남자의 뒤로 보이는 배경은 모래가 깔린 허허벌판처럼 보인다. 아마도 얕은 내리막길에 세워진 차가 점점 낭떠러지 쪽으로 다가가고 있는 것 같다. 자동차는 결국 멈췄을까. 화면은 다시 또 다른 자동차 속으로 들어가 정적으로 고정된다.”
그 순간이 아버지가 거의 뛰셨던 유일한 순간으로 내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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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쓴다면 보조석에 앉아 있는 누군가라고 쓴 부분을 고치고 싶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다고 상정한 것은 내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혹은 그 현장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삽입된 오류에 가깝다. 그 사건과 조금 더 거리를 둔 지금에서야 현장과 거리를 둔 비평의 입장에 가까워졌고, 그 모습은 마치 남자가 자동차에 대고 외치는 모습으로 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자동차에게 멈추라고 명령 혹은 애원한다. 그 순간 차를 멈춘 건 누군가의 손 혹은 손가락이 아니라 차라리 마술 혹은 기적이다. (물론 음성 인식 AI를 통해 기적이 이제는 기술 영역으로 들어왔고, 그렇다면 그 영상은 일종의 광고영상이 되겠지만, 나는 광고를 상상한 것이 아니므로 마술 혹은 기적에서 멈추겠다.)
그때 그 자동차는 자신의 첫 주인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의 ‘아빠 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