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소희 Aug 14. 2024

검은색 자동차를 탄 남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특별전] '라스트 미션'과 '황야의 무법자'

처음으로 아빠 없는 아빠 차를 타던 날, 함께 탄 고모의 입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 불온하게도 묘한 흥분이 일었다. 아빠가 젊은 시절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좋아하신 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어쩐지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 같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면서 종종 아빠를 떠올리곤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올린 즉흥적 생각을, 오래된 기억이라고 착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아빠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이에는 딱히 닮은 부분은 없다. 아마 아빠를 아는 사람들조차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굳이 꼽자면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에 셔츠 차림, 기운이 없음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지만, 고모의 말을 듣는 순간, 표면적인 비슷함을 넘은 어떤 영역에서 둘을 운명적으로 연결하고 싶어졌다.      


방대한 이스트우드의 영화 세계에서 아빠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셨느냐고 따져 묻지는 않았다. 아빠가 젊은 시절이었으니 그가 출연한 서부극 중 하나일 거로 추측할 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근작에 더 익숙한 나는 아버지가 그의 후기작을 보셨을지, 보셨다면 어떤 평가를 내리셨을지 궁금하다.     


*

나는 당장 감독론이든, 배우론이든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관해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에 조급해졌지만, 내가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관해 무언가를 쓴 건 등단 전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했을 때 참여했던 네이버 ‘테마로 보는 세계영화작품사전 500’에,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황야의 무법자>에 관해 쓴 것이 유일했다.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우연히 내게 맡겨진 영화였다. 비평이라기보다 최대한 객관적이고자 노력한 해설에 가깝지만, 현재로서는 이 기록만이 이스트우드와 나를 잇는 지푸라기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2621&docId=2074128&categoryId=44442


몇 안 되는 단서로 유추해 보자면 아버지는 유럽 영화, 특히 이탈리아 영화를 좋아하셨던 것 같다. 그러므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탈리아에 기반을 둔 스파게티 웨스턴에 출연했다는 사실은 절묘한 우연처럼 느껴진다. 물론 해설에서 언급했듯 이 <황야의 무법자>를 이탈리아 영화라고 못 박기는 어렵다. 영화가 배경을 둔 공간은 웨스턴의 본토인 미국과 이탈리아, 멕시코, 일본 등의 문화가 무질서하게 뒤섞인 혼종적 공간에 가깝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스파게티 웨스턴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없다.     

 

**

수많은 중간 지대를 생략하는 우를 무릅쓰고 스파게티 웨스턴, <황야의 무법자>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근작을 연결해 보면, 이스트우드는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무언가를 타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과거에 말을 탔던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자동차를 운전한다. 이동 수단은 바뀌었지만, 그는 결코 그가 떠나온 곳을 잊지 않았다.      


그의 영화 속에서 서부극에 대한 직간접적인 인용이 종종 발견된다. 그가 실화에 바탕을 둔 드라마 속에서 선한 사람들의 고통과 윤리를 다룰 때, 그는 마치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서부의 규율에서 찾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오늘날의 선인에게서 선량한 서부극 무법자들을 발견하려 한다. 차라리 그는 자신이 만든 두 개의 세계를 끊임없이 이동하는 중이다.      


<라스트 미션>은 현재 미국을 배경으로 서부극의 세계를 상상한 작품처럼 보인다.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 흑인 비하 단어를 쓰는 얼은 마치 서부극의 시대에서 직행한 사람처럼 보인다. 스파게티 웨스턴을 다른 주인공인 멕시코인은, 마약을 밀매하는 조직 형태로 화려하게 복귀한다. <황야의 무법자>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두 세계를 교란했던 것처럼 얼은 정형화되지 않은 움직임으로 마약 밀매 조직과 경찰 조직을 모두 교란한다.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를 <황야의 무법자>의 남자처럼, <라스트 미션>의 얼 역시 극초반 살던 집을 잃으면서 시작한다. 서부극의 외인에게 말이 하나의 정체성이듯, 얼에게 자동차는 그의 정체성이다. 물론 자동차와 주인공의 동일시에 가까운 연결은 전작인 <그랜 토리노>에 더 적절한 말일 테지만, 중국계 이웃과 교감의 매개와 유산으로 남은 온건한 자동차보다는 <라스트 미션>의 불온한 모험에 끌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라스트 미션>에서도 한 편으로는 가족과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바로 가족과 화합하는 순간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얼의 가장 큰 일탈이라는 점에서 가족은 흔히 생각하는 온건함으로 풀이될 수 없다.       


***

얼은 자동차를 운전하고 또 운전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운전하는 장면이 이 영화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오랫동안 함께 한 낡은 트럭이 운을 다한 뒤에는 크고 튼튼한 검은색 자동차를 몰면서 그는 마약 운반책이라는 목적에 경도되지 않은 행보를 보여준다. 놓치면 안 되는 맛있는 식당을 들르고, 곤경에 빠진 사람을 마주하면 도와주고,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며 여정을 즐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면, 아버지가 운전을 좋아하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게 된다. 물론 아버지가 혼자 운전하실 때 카 오디오에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할 순 없지만 말이다.    

  

결국 얼은 FBI 요원들에게 덜미가 잡히고 만다. 순순히 수갑을 찬 채 경찰차 뒷좌석에 탄 그의 옆으로 문이 닫힌다. 그런데 달리는 차 안의 얼을 보여주는 숏에서 그의 머리카락이 날리는 모습이 포착된다.

바람인가?

용의자를 호송하는 차에 친절히 창문을 열어둘 리는 없을 텐데, 그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온 것일까.

그 바람은 이스트우드가 자신에게, 혹은 다른 자신들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우일지 모른다.      


법정 진술에서 그는 노인이라는 핸디캡을 활용해 법망을 빠져나오는 대신, 자신의 죄를 당당히 인정한다. 이로써 그가 꼿꼿한 서부의 적자임을 선언한다. 교도소에 수감된 얼의 마지막은 교도소 바깥의 화단을 가꾸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물론 그는 거대한 철조망 안에 있지만, 결코 갇힌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을 때, 공교롭게도 아버지의 전용 주차 구역이 사라졌다. 아파트 입주민 회의에서 건물 뒤편 출입문 근처 장애인 주차 구역을 다른 쪽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이제는 주차구역이 어디로 바뀌든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절묘한 타이밍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아버지의 남겨진 자동차를 처리하는 문제를 논의해야 했을 때, <그랜 토리노>가 떠올랐다. <그랜 토리노>처럼 자동차를 통해 누군가의 세계를 이어받는 일은 상상에나 가능했다. 나는 아버지의 차를 끝도 없이 운전하는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아버지의 차를 중고차 시장에 내다 팔지 않을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얼의 자동차는 어떻게 되었을까. 얼이 체포된 뒤 그가 타던 자동차의 행방은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누군가가 대신 몰거나 견인되는 결말이 가장 그럴듯하겠지만, 엄밀히 말해 차는 길 위에 세워진 모습으로 퇴장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자동차가 영원히 길 위에 남았다고 상상하는 것은 나의 자유다. 중단은 언젠가 다시 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전 03화 서서히 굴러 내려오는 중립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