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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Aug 21. 2024

백인 추장을 찾아서

[스페셜 프로그래머] 페데리코 펠리니의 '백인 추장'

“아빠는 어떤 영화를 좋아하셨어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날은 아버지께 이렇게 물었다. KTX역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아빠가 탄 운전석과 대각선 방향 뒷자리에 앉아서.


KTX를 타고 역에 내려 빠른 걸음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싣는다. 긴 통로를 빠져나와 출입문 안쪽 오른편에 있는 보리빵 파는 상점을 지나기도 전에 아빠가 보인다. 혹시나 찾지 못할 새라 잘 보이는 잘 보이는 곳에 아빠가 서 계신다. 나를 발견하시고는 희미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신다. 힘이 없으셔도 나의 트렁크는 꼭 들어주려 손 내미신다. 제가 들게요. 나도 호락호락하게 트렁크를 넘기지 않는다.


“<백인 추장>을 재미있게 봤지.”


운전하는 아빠의 뒷모습만 볼 수 있을 따름이었지만, <백인 추장>에 관해 말하실 때, 미소를 지으셨던 것 같다. 목소리에도 분명 신남이 묻어 있다.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열어 검색해 보니 페데리코 펠리니의 1952년 작품이다. 필람작 목록에서 빠지지 않던 <8과 1/2>이나 <길>이라면 아빠와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은데 처음 듣는 영화였다. 아빠가 펠리니 영화를 좋아하셨다니 의외다. 영화를 보았다면 이런저런 대화를 더 이어갈 수 있었겠지만, 아빠의 취향의 조각을 알게 된 것만으로 일단 만족했다. 그나저나 <백인 추장>이라니 펠리니의 서부극인지 뭔지 종잡을 수 없는, 딱히 끌리는 제목은 아니었다. 영화를 찾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더는 아빠와 영화에 관해 대화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이 영화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

영화는 한 신혼부부가 로마 바티칸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남편 이반의 고향에서 교황님을 뵙고 결혼을 서약하는 것이 목표지만, 아내 반다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백인 추장’ 캐릭터로 유명한 배우 페르난도 리볼리를 만나는 것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부부가 서로 떨어지는 상황을 반복해서 묘사한다. 기차가 도착하는 첫 장면에서도 부부는 따로 있다. 남편 이반이 먼저 내리면 아내 반다는 창밖으로 가방을 건네주기 위해 기차 안에 남아 있다. 호텔 체크인을 할 때도 이반이 숙부에게 전화하는 동안 반다는 혼자 객실로 안내된다. 객실에 함께 있게 되었을 때도 반다는 샤워를 핑계로 빠져나와 홀로 거리로 나가버린다. 전체를 통틀어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는다.


부부의 헤어짐은 결합의 조건이기도 하다. 반다가 배우들을 따라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해변에 도착해 꿈같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반은 친척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현실적인 조건들과 씨름한다. 그러나 환상에도 현실이, 현실에도 환상이 그늘을 드리운다.

반다의 환상은 리볼리가 촬영 중간 반다와 단둘이 배를 몰고 나가 노골적인 스킨십을 시도하고, 그 사이 현장에 나타난 리볼리의 아내 리타가 둘을 감지하면서 깨어진다. 환상의 대가로 반다는 리타에게 뺨을 맞고 모욕을 당한다.

반대로 이반 역시 현실 안에서 환상의 순간을 맞는다. 늦은 시간까지 반다가 나타나지 않자, 경찰서를 찾아간 이반은 가족의 명예가 더럽혀질 것이 두려워 결국 신고를 포기한다. 망연자실해 밤거리에 홀로 앉은 그의 머리 위에는 별이 밝게 빛나고  환상처럼 두 사람이 나타난다. 그중 한 사람은 줄리에타 마시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끙끙 앓던 사연은 밤의 방랑자들 앞에서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 이반을 위해 마련된 이와 같은 환상의 시간은 반다가 맞이한 얼떨떨한 꿈에도 뒤지지 않는다.


**

아빠가 왜 이 영화를 좋아하셨던 걸까.  


이유는 몰라도 아빠가 좋아한 영화가 코미디 영화라는 점이 반가웠다. 이래 봬도 나도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 작정하고 웃기려 드는 영화는 시큰둥하고, 나와 유머가 통하는 영화를 만날 때만 작동하는 특유의 기쁨이 있다.


영화에서의 유머는 이반을 연기한 배우 레오폴도 트리에스테로부터 거의 나온다. 커다란 눈과 과장된 표정을 한 그는 얼굴만으로 능히 슬랩스틱을 한다.      


나는 은연중에 영화 속에서 아빠와 비슷한 캐릭터를 찾고 있었다. ‘백인 추장’으로 불리는 페르난도 리볼리의 능글맞은 바람둥이 캐릭터는 아빠와 가장 먼 편에 속했고, 이반의 경우 사회적 체면을 중시하는 면은 아빠에게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성격은 닮은 구석이 별로 없었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보다 더 아버지와 닮은 캐릭터는 차라리 반다였다. 반다는 겉보기는 얌전해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동경과 동경하는 것을 따를 수 있는 적극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호텔 직원을 통해 리볼리와 만나기로 한 장소가 가까이 있음을 확인한 반다가 슬며시 미소 짓는다. 그 미소는 <백인 추장>을 말할 때 아버지의 얼굴과 목소리에 슬쩍 떠오른 미소와 겹쳐 보였다.


***

아빠는 언제 이 영화를 보신 걸까.


오래된 신문을 검색해 보니 1956년 국도극장과 1959년 청계에서 <백인 추장>이 상영한 기록이 있다. 그런데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백인 추장>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다른 영화가 있었다. 버트 랭커스터가 주연한 동명의 영화가 1984년에 TV에서 방영된 기록이 있다. 원제는 <오키프 폐하>이지만, 한국에서 방영될 때의 제목은 <백인 추장>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영화는 실은 <오키프 폐하>(1954)가 아닌지 잠시 고민했다.

그런데 아빠와 <백인 추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을 때, 뒤에 덧붙였던 말들이 생각났다.


“어? 페데리코 펠리니 영화네요?”

“코미디 영화요?”


정확한 대화를 복원할 순 없지만, 아빠는 저 물음에 그렇다고 답하셨다. 그렇다면 아빠가 말씀하신 영화는 페데리코 펠리니가 맞는데, 과연 1959년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가 펠리니의 영화가 맞는지, 아버지가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신 건지에 관한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시 KMDB 사이트를 뒤져보니 <백인 추장>이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영화가 나왔고, 그중 바이런 해스킨이 연출하고 버트 랭커스터가 주연한 <백인 추장>이 1956년 3월 7일에 국내 개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가 본 신문 기록은 미국 영화 <백인 추장>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펠리니의 <백인 추장>은 국내 개봉한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보셨을 확률이 가장 큰데, 국내 비디오 출시일은 확인하지 못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자료는 2004년 출시된 DVD와 블루레이가 유일했다.


<백인 추장>에 관한 기록을 찾는 건 이것이 최선인 것일까.


혹시 20세기에 이 영화를 극장, 비디오, TV로 관람한 경험이 있으시거나, 관련된 정보를 알고 계신 분이 있다면 제보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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