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야 할 자리

사람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지 않을까?

by 코코넛




하루에 거울을 보는 횟수는 아침과 저녁

화장할 때와 지울 때 두 번인데,

며칠 전에 아랫입술이 간질댔었다.

그러더니 다음 날 아침 간질이던 곳이 발갛게 부풀였다.

특별하게 무리했던 일이 없었던 듯해서 이상했다.


핸드폰의 만보기 어플을 열어서 봤더니

최근에 내가 걷는 양이 많아졌음을 확인했다.

평소만 보가 조금 넘게 걸었었는데 갑자기 최근의 걸음 수는 하루 이만 보 정도를 걸었고,

며칠 전에는 연속 3일을 삼만 보가 넘은 기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몸에 무리가 갔으니 입술이 부르틀 만했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상태지만 거울을 볼 때마다

이팔청춘이 아니니 무리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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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얼마나 허황한 바람개비같이 변덕스러운 존재인가!

세상과 모든 관계를 끊으려 결심하고

마침내 관계를 가지려야 가질 수도 없는 장소를 발견하여 내 운명에 감사한 나였건만,

약한 인간인 나머지 어두워질 때까지

우울과 고독과의 싸움을 계속하다가 결국은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발췌


입술에 남은 흔적이 준 경고를 잊고서 대청소를 했다.

계절보다 앞서 살아보려는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차가운 물을 오랜 시간 만지고 싶었는지 둘 다였을지.

대청소라고 해 봐야 책장의 묵은 먼지 털어내기와 옷방 정리, 화장실 청소가 전부다.

이 정도를 대청소라고 말한 이유는 평상시 청소할 때 자주 빼먹고 하기 때문이다.

천성이 게으른 탓에, 쓸고 닦아서 윤이 반드르르 흐르게 하고 살지 못한다.

대충 보면 깨끗한데 자세히 보면 먼지가 구석구석에서 발견되는 상태랄까?

뒤돌아보니 평생 그랬다. 바빠도 한가해도 집안 상태는 언제나 비슷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물건들이 있으니

깨끗해 보이는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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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거미라도 보통 집에 줄을 치면 반갑지 않지만,

감옥에서 줄을 치면 거기 갇혀 있는 사람에게는 반가운 것처럼

나로서는 도시 사람들은 재미가 없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매우 재미있소. “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발췌


날이 더운 날 물청소는 마치 물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어서

청소하는 기분이 아니라 노는 기분이 더 강하다.

타인의 눈이 내 모습을 봤다면 분명 열심히 청소하는 중이었겠지만,

정작 나는 물을 갖고 논 시간이었다.

물놀이를 하던 중 물건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정리가 잘 되어 보이고 깨끗하게 보이듯이

사람도 제각각 있어야 할 자리, 자기에게 알맞은 자리가 있을까?

만약에 그런 게 존재한다면 나는 현재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인가?

그렇겠지?

내가 선택한 대로 현재에 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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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를 털어내고 물을 오래 갖고 놀아서였는지

갑자기 책의 배열이 너무 평범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책장의 책들을 다시 배열했다.

기존의 책장에 책을 꽂아놓은 방식은 도서관과 비슷했던 배치였다.

혼자 사용하는 책장인데 왜 공용 책꽂이처럼 분류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들끼리 묶어서 배치했다.

시집과 소설과 산문집이 섞였지만 좋아하는 순서대로 옮겨 놓으니 나름대로 질서가 생겼다.

정리가 모두 끝난 후 보니 흐뭇했다.

책꽂이가 이제야 내 전용이라는 느낌? 오늘은 흐뭇하지만 어쩌면 내일,

혹은 한 달 후 나는 다시 책들을 다르게 배치할 수도 있다.

작은 물건은 쉽게 자리 배치를 할 수 있으니까

변화를 필요로 할 때 가장 만만한 상대가 책이나 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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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시작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의 문턱에서는 넘어지기도 하고 비틀거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그런 우리를 깨우쳐 주지 않고 비웃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넘어지고 비틀거릴 겁니다. “


-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발췌


주기적으로 물건의 배치를 바꾸는 습관은 사실 아주 오래되었다.

게으른 사람이 부리는 재주 혹은 꾀와 같다.

한때는 가구 배치까지 주기적으로 바꾸고 또 바꾸었었다.

먼지 한 톨 없이 쓸고 닦아내는 일은 매일 해야 가능한데

물건의 재배치는 가끔 기분전환이 필요할 때 하는 것이라 덜 힘들고 재미있다.

세월이 흘렀기에 이젠 자잘한 물건, 쉽게 옮길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변화를 주는 셈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깔끔하지만 자세히 보면 먼지가 있는 그런 집이 된다.


오늘, 이렇게 물건들이 또 다른 자리에 안착했으니

한동안은 기분이 새로울 듯하다.

자주 이사하지 않는 사람에게 좋은 기분 전환이다.

내 몸이나 얼굴을 바꿀 수 없으니 옷으로 변화를 주는 것과 닮았다.


물건도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어울리듯이

사람도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아름답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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