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강물이 서로 희롱하듯 반짝반짝 속도전
도서관 4층의 창을 통해 한강을 내려다보았다.
더위 탓인지 한강 변은 고요해 보였고, 바람도 잔잔한지 강물은 작은 너울로 출렁인다.
내 시력으로 먼 거리의 강물이 출렁임을 볼 수 있는 것은 오롯이 윤슬 덕분이다.
윤슬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으므로 눈부셨다.
<반짝? 윤슬이 모습을 보였다 사라지고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걸 지켜보자니
강물과 바람이 서로 희롱하는 듯? 애무하는 듯?
아, 순수한 시선으로 보면 이야기하는 듯이 보였다.
문득, 신념이라고 호명되는 그 무엇, 초심이라고도 불리는 그 무엇,
마음에 서식하는 그들과 닮은 관념은 혹시 바람과 닮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을 자주 했었고,
타인들로부터도 자주 들었었던 기억이 불러낸 사념일 뿐,
다른 이유나 목적이 딱히 없는 생각이었다.
처음은 스치는 바람처럼 떠올랐던 관념세계에 대한 생각은
묘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흐르는 강물을 보다가 떠올랐던 그 생각이
강물이 흐르듯,
바람이 강물에 너울을 만들듯,
꼬리물기를 시작했다.
아예 도서관 창가에 기대어 강물을 바라보았다.
”유명한 대학 세 곳에서 비프더러
돈 한 푼들일 것 없이 들어오기만 해 달라고 굽실거려요.
그런 대학만 들어가면 그다음부터는 못 할 게 없죠.
그런 동네는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
얼굴에 미소를 짓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곳이죠.
형님, 인적 네트워크가 최고라니까요!
코모도 호텔에 가면 점심 식사에서 알래스카 경제 전체가 왔다 갔다 하지요.
사람들 마음에 들기만 하면 다이아몬드를 벌어들일 수 있는 곳이 여기라서니까요.
이 나라의 놀라운 점이죠. “
-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발췌
대학교들이 학교홍보를 넘어 영업을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지?
아마도 현대로 분류되는 시점부터가 아닐까?
아니 20세기 중후반부터였을까?
물론 아직도 상위권 대학 몇 곳 중 몇 학과는 치열한 경쟁률을 자랑하지만,
출산율 저하가 몰고 온 여파로 다수의 대학은 미달의 연속이라
학과들이 학부로 통합되어서 학생을 모집하고,
해가 거듭될수록 대학들의 사정이 힘든 상황이다.
신화와 종교, 철학이 시대별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대중을 선도하던 시대의 학교는
아니, 대중이 신분에 상관없이 교육받을 수 있던
근대의 대학은 <상아탑>이라는 단어로 빛나는 위상을 발휘했었다.
그때가 좋았었다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교육이라는 본질은 분명 명맥을 유지하고 있고
교수법은 시대별로 진화하는 중이다.
학교당국과 교수들은 몸살을 앓듯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21세기의 대학은 윗 문장처럼 된 것이 맞다.
마치 물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데, 우리의 눈에 보이는 물의 너울에서 피어나는 윤슬처럼.
신념도 그렇게 반짝이는 삶의 불꽃이 아닐까?
아름다운 한강의 흐름이 나를 홀렸는지 뜬구름처럼 잠시 머문 생각이
왜 이리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까?
토요일이라 야외에서 가족들과
혹은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서 즐기는 사람들이 많을 휴일인데,
이렇게 도서관에 콕 처박혀서 작업을 하다 보니
심술이 고개를 내민 것일까?
그곳이 공공장소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잊고
기지개를 켜다 무안해져서 급히 팔을 거두고 자리로 돌아갔다.
꽤 긴 시간 작업에 몰두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가에서 떠올랐던 생각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그게 뭐라고, 아니지 내 생계와 연결은 되었지?
잠시 쉬는 시간에 윤슬처럼 반짝 내 마음으로 들어온 상념을
도서관 창가에서 지우지 못하고 끝내 집까지 데려왔다.
”아무도 이 사람을 비난할 수는 없어.
넌 몰라. 윌리는 세일즈 맨이었어,
세일즈 맨은 인생의 바닥에 머물러 있지 않아.
볼트와 너트를 짜 맞추지도 않고, 법칙을 제시하거나 치료약을 주는 것도 아니야.
세일즈맨은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하늘에서 내려와 미소 짓는 사람이야.
사람들이 그 미소에 답하지 않으면 그게 끝이지.
모자가 더러워지고, 그걸로 끝장이 나는 거야.
이 사람을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어.
세일즈맨은 꿈꾸는 사람이거든. 그게 필요조건이야. “
-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발췌
살아오면서 신념이 바뀌었다고 말한 사람을 만난 적은 없으나
역사 속에서 혹은 작가의 글 속에서 한 사람의 신념이 어떤 경로로 바뀌는지 보았다.
신념이 바뀌는 현상을 변절자라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그런 평가는 신념을 너무 대단한 것으로 오해한 것에서 태어난 판단이다.
신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초심으로 돌아가자>와 같이
어느 순간 바뀌어있곤 하는
일종의 감정과 비슷한 관념이 아닐까?
그러므로 나는 그런 현상을 변절이 아닌 성장으로 혹은 진화로 보고 싶다.
혹시, 신념이 바뀌는 이유는 외부 환경이 바뀌기 때문은 아닐까?
필요충분의 조건처럼,
상황이 바뀌니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니
당연히 신념도 바뀌는?
아, 이렇게 갈팡질팡하지 말고,
아직 남아있는 오늘의 시간은
아침의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작업에 열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