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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 Jul 25. 2017

비 듣는 산행

상주 공성면 백학산을 다녀와서

    

    백학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포리예요. 아, 백학산이 어디냐구요? 경상북도 상주, 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한 부분예요. 높이는 615m 밖에 되지 않아요. 저 희뿌연 산에서부터 몰려오는 비구름 보이세요. 아마 저 비구름이 저를 따라왔나 봐요. 비는 한곳 빠짐없이 내려앉았고, 저는 비속을 새처럼 물고기처럼 반은 날고 반은 헤엄쳐 윗왕실재에 닿았어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함성 때문에 목이 다 쉴 정도였죠. 비속에서 여름은 무성해져가고 있었고, 저 역시 자꾸만 자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백학산을 거의 다 내려와서였던가요. 무슨 소리지? 나뭇잎 위로 후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싱그러운 잎들에 튕기는 빗소리는 맑고 부드럽기 그지없었어요. 비가 오는 것도 ‘듣다’라고 하는 거 아시죠? 비가 듣는다고 처음 말했던 사람은 비가 오는 걸 촉감이나 시각이 아니라 소리로 먼저 알았나 봐요. 빗줄기가 듣는 소리를 듣는 일이라니! 그렇게 감격하는 사이 굵은 빗줄기가 무성한 잎들을 헤치고 제게로도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세찬 빗줄기에 두드려 맞듯 흠씬 젖었는데, 아, 이렇게 좋다니요. 어떤 걸 청우(淸雨)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이런 게 그런 비가 아닐까요. 비속에서 산도 들도 저까지도 더불어 청아해지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산속에서 홀로 “우와 우와” 소리만 연거푸 내며 뒷말을 잇지도 못한 채 반은 날고 반은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갔어요. 산우(山雨) 속에서 산우(山友)를 지나치며, 어이쿠 산에서도 뵙고 수영장에서도 뵙네요, 이랬던가요. 아니면, 수영은 할 만하세요, 였던가요? 전 새처럼 물고기처럼 단숨에 윗왕실재에 이르렀어요. 

    산에서 비를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봐요. 이러려고 아침에 씻지 않았던 걸까요. 상선약수(上善若水)! 그 말이 딱이더군. 언젠가 박완서는 소나기가 오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어요.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 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우리는 하늘을 향해 미친 듯한 환성을 지르며 비를 흠뻑 맞았고, 웅성대던 들판도 덩달아 환희의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우리는 너울대는 옥수수나 피마자나무와 자신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2015, 30면).     


정말이지 비는 군대처럼 쳐들어왔고, 저는 폭발적인 환희 속에서 산과 나무와 길과 함께 젖어 그들과 구분할 수 없었어요. 산 속에서 비 듣는 소리를 들으며 온갖 소리를 맡고 맛 볼 수 있었어요. 그동안 왜 사람들이 등산이 아니라 산행이라 하는지 몰랐어요. 익숙해질수록 알겠더군요. 등산은 애써 산을 오르는 것이지만, 산행은 산과 어우러지는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 글은 경북매일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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