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는일학년담임 Jun 29. 2023

태어나 첫 일기를 쓴다는 것

1학년 아이들이 첫 일기 쓰던 날


6월 말. 요즘 1학년 아이들은 그림일기를 배웁니다. 1학년 아이들이 생에 처음으로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순간이지요. 그동안 우리 아이들은 남이 지어낸 남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라왔는데 이제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주체로 성장했습니다. 주체적인 인간의 길에 들어 선 셈이네요. 주체적인 인간은 자기 삶, 자기감정의 주인입니다. 주인인 자신의 삶을 기록하는 일은 짜릿한 일입니다. 이는 아이의 발달 단계와 관련 있습니다. 자아를 발견하고 스스로 대견해하며 어떤 놀이를 누구와 어떻게 놀 지를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빠르게 자라는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부모님에 의해 수동적으로 양육되어 오는 동안에는 자아를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안전하고 교육적인 의도로 만들어 놓은 무대에서 조연 배우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자신이 무대를 직접 만들고 주연 배우로 데뷔한다고 할까요.

아이가 일기를 쓰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아이 내면의 성장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우리는 잘 압니다. 일기를 부지런히 쓰는 아이들은 대체로 행동이 바르고 성실합니다. 학력도 높지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일기 쓰라는 권유를 적극적으로 합니다. 일기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내 삶의 기록이므로 쓰면서 존재 가치를 느껴보라는 의미겠지요. 하지만 일기의 진정한 목적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자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걸 어떤 감정으로 대했는지, 마치 남이 나를 보듯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보라는 의미지요. 나를 마치 내가 아닌 남인 것처럼 보는 시선, 즉 타자화입니다.

<타자화(他者化,objectification) : 특정 대상을 다른 존재로 보이게 만듦으로써 분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말과 행동, 사상, 결정 등의 총집합>

어른에게 타자화는 아주 익숙하지만 아직 어린 1학년 아이에게는 어렵고 생소한 경험입니다. 지금까지 자라면서 경험하지 못했고, 그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타자화 경험을 시작하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자신 행동을 다른 이의 시선에서 인식할 수 있으므로 옳은 행동과 나쁜 행동을 구분할 수도 있고 바람직한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으로 구별할 수도 있게 됩니다. 윤리적 인간으로 성장 할 수 있게 되는 거지요. 이때부터 아이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잘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내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해 주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돌아볼 수 있지요. 반성적 사고의 시작입니다. 이는 아이를 더 새로운 성장과 배움의 장으로 이끌지요. 일기를 쓰면서 아이는 자신을 하나의 실존적 인간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요즘 우리 아이가 배우는 1학년의 그림일기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림일기로 시작된 아이의 글쓰기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국어 공부의 기초가 됩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하는 아이는 남의 글도 잘 이해합니다. 독해력이 높아지는 거지요. 독해력이 중요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정보들이 문자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내용도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독해할수록 똑똑한 사람이 되지요. 또 하나 시험 때문이기도 합니다. 현재 국가 차원에서 시행하는 시험의 대부분은 문자로 출제됩니다. 출제자가 지어낸 문장을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겠네요. 특히 언어 영역에서 독해력은 필수적입니다. 수십 줄의 지문을 주어진 시간에 얼마나 잘 이해했는가를 물으니까요. 수능 시험을 겪는 학생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과목도 국어입니다. 흔히 말하길, 다른 교과는 외우고 풀면 되는데 국어는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해도 만점 받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이렇게 좋은 일기를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어떤 아이는 그림일기 쓰기에 흥미를 느끼고 심지어 즐거움을 느끼면서 빠져들지만,  어떤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흥미를 느끼는 아이는 앞으로 공부할 국어 공부도 쉽겠군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는 힘든 난관일 듯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1학년에게 그림일기는 지겹고 어려운 작업이어선 곤란합니다. 이왕이면 재미있는 소재를 떠올리게 해 주고(또는 경험하게 해 주고) 부담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난이도로 시작해야 하며 결과에 대해서는 아이가 만족할 정도의 칭찬으로 보람을 느끼게 해야겠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하는 이유는 흥미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기를 쓸 때 꼭 생각이나 느낌을 쓰면 좋겠습니다. 비록 흥미 없이 억지로(?) 쓴 일기지만 자신의 감정을 부여하다 보면 일기 속 이야기가 더 가깝게 느껴지거든요.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요.

<오늘 공부 시간에 ㅇㅇ와 싸워서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사실 잘못은 ㅇㅇ가 먼저 놀려서 싸웠는데 똑같이 야단맞았다. 선생님께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쉬는 시간이 끝났으니 빨리 들어가 공부 준비 하라고 해서 말 못 했다.>

<오늘 공부 시간에 ㅇㅇ와 싸워서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다. 사실 좀 어이가 없었다.  잘못은 ㅇㅇ가 먼저 놀려서 싸웠는데 똑같이 야단맞다니! 이렇게 억울할 수가 있나? 선생님께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쉬는 시간이 끝났으니 빨리 들어가 공부 준비 하라고 해서 말 못 했다. 억울하다는 말을 못 해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먼저 놀린 ㅇㅇ도 밉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은 선생님도 밉다.>

같은 일기지만 아이들은 아래의 일기처럼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때 일기를 쓰고 싶어 진다고 했습니다. 교사가 학생 일기를 검사하는 건 개인의 사생활과 사상을 검열하는 것이니 검사하지 않는 게 좋다고 국가 인권 위원회에서 권고한 뒤로 일기 검사는 없어졌습니다. 그런데도 고학년 아이 중에는 일기를 꽤 길게 쓰는 아이들이 제법 되더군요. 굳이 필요 없는(?) 일기를 아이들은 왜 쓰는지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 동생하고 싸운 얘기를 일기에 쓴 적이 있는데 일기장에 억울한 마음을 썼더니 속이 후련해졌어요. 원래는 동생 욕을 쓸라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동생이 아직 어려서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참자, 그렇게 쓰게 되더라고요.

- 배 아파서 학원 안 가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난 적 있거든요. 그땐 억울해서 울었는데 일기에 쓰고 나니까 이상하게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 학교에서 애들한테 짜증 나면 욕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근데 정말 욕하면 난리 날 거 아니에요? 일기장에 쓰면 마음이 풀리더라고요. 어떤 땐 일부러 일기에 욕을 쓰려고 했는데 막상 쓰려고 보니 벌써 마음이 가라앉더라고요. (왜 그럴까?) 일기장이 제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요.

- 전 화날 때 일부러 예전에 화나서 쓴 일기를 보기도 해요. 그럼 마음이 편해져요.

와! 아이들은 일기를 통해 자기감정을 들여다보고 해소하는 방법을 터득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좋은 감정은 좋게, 나쁜 감정은 나쁜 대로 솔직히 표현하게 두는 겁니다. 담임했던 아이가 부모님의 다툼을 소재로 일기를 썼는데 부모님이 이걸 보시고 다른 소재로 다시 쓰게 하신 일이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가 나중에 자라 일기를 보고 부모님이 감추고 싶은 면을 기억해낼까 봐 불편해서 그런 듯합니다. 근데 아이 처지에선 꽤 억울했는지 두고두고 저에게 그 일을 말하더군요. 아이 마음속에 석연치 않은 느낌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기억하고 싶은 사건과 감정은 아이 고유의 것인데 부모님이 검열을 하고 조작했습니다. 이러면 아이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을 갖기 힘들고 자기 생각을 스스로 의심하게 됩니다. 불안은 높아지고 판단은 흐려지겠지요. 때문에 아이가 기록하고 싶은 내용과 감정은 침해받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아이가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힘이 자라거든요.

그림일기는 그림 + 글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그림은 어디까지나 기억을 상세화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그림에 기운을 많이 쓰는 아이를 꽤 봅니다. 색을 꼼꼼하게 칠하게 하거나 너무 많은 내용을 담는 거지요. 이런 아이의 경우 대개 글은 부실한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를 들어보면 시사점이 있습니다.

- 어제 비 왔잖아요. 동생이랑 우산 쓰고 마당에서 논 그림을 그렸단 말이에요. 그래서 사람 두 명이랑 우산을 그렸죠. 근데 엄마가 빗방울이 없냐고 그리라 그러잖아요. 근데 빗방울이 엄청 많잖아요. 그거 그리려면 손 아프다고요. 그래도 참고 그렸죠.  근데 이번엔 색을 칠하라 그러잖아요, 글쎄! 색까지 칠하니까 손가락이 아파서 글자는 못 썼죠. 그니깐 선생님이 우리 엄마한테 그림은 대충 그려도 된다고 문자 좀 보내주세요.

그림일기는 문자 일기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입니다. 그림 보다 문자가 본질이지요. 아이가 그림에 집중하느라 너무 기운을 쓰지 않길 바랍니다. 그림에 너무 신경 쓰다 보면 일기 쓰기가 싫어질까 봐 걱정입니다.


그림일기 쓰는 방법을 가정에서 다로 가르치고 싶은데 어떤 수준까지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다른 친구들의 수준을 모르니 어느 선까지 지도해야 할지 고민이신가 봐요. 우리 반 아이들의 일기를 몇 편 소개해보겠습니다. 






식당에서 본모습을 말주머니까지 넣어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습니다. 음식을  '천국의 맛'으로 비유한 표현이 정말 좋네요.






혼자 그네를 타는 모습을 잘 표현했습니다. 옷이 젖을까 봐 일어서서 탔다는 아이의 마음이 잘 느껴지는군요.






군더더기를 다 빼고 일기에 필요한 내용만 선정해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정성스러운 글씨도 아름답군요.






그림과 글씨를 보니 아이의 깔끔하고 정돈된 마음이 느껴집니다. 아빠와 함께 즐거운 모습이 그림과 문장에 잘 나타나있군요.







친구와 논 일을 소재로 골랐습니다. 얼마나 즐거웠으면 저렇게 밝고 싱그러운 색을 골라 칠했을까요? 너무 즐거워서 또 놀고 싶다고 표현한 부분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즐거운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꿈같았던 기억을 고스란히 일기장에 옮겼군요. 노란색을 보니 아이가 느꼈을 행복이 떠오릅니다.







교실 모습을 아이의 시선에서 실감 나게 표현했습니다.






태권도장에서 배운 돌개차기가 인상 깊은 하루였나 봅니다. 있었던 사실과 그때 느낀 생각이나 느낌을 잘 표현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은 왜 뚱뚱한 친구를 놀릴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