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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는일학년담임 Oct 27. 2023

"엄마, 야한 옷 좀 작작 입으세요!!!"

엄마가 노래방 도우미인 아이와 상담한 이야기

사춘기가 시작되는 초등학교 6학년은 부모와 갈등도 시작되는 시기다. 그래서 이 시기 아이들과 상담할 때는 가족 관계도 한 부분이 된다. 상담을 앞두고 아이들에게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을 한 문장으로 쓰기> 활동을  한다. 아이들이 쓴 문장은 대부분 공부와 관련되어 있다. 공부 때문에 친구와 못 놀게 하고 스마트폰 사용과 게임도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다. 사실 이런 문제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해서 학부모 상담 때 아이가 쓴 문장을 보여드리고 대화해 보시기를 권하면 상황이 좋아진다. 하지만 어떤 아이는 나도 난감해지는  문장을 쓰기도 한다.

<엄마, 야한 옷 좀 작작 입으세요!!!>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 말해줄 수 있니?"


"엄마가 옷을 너무 야하게 입으니까요."


"아, 그래? 그럼 야한 옷이 어떤 옷인지 말해줄 수 있니?"

"(문장이 적힌 공책을 성의 없이 툭 치며) 있잖아요. 노출 심한 거."

"엄마가 야한 옷을 입는 게 싫구나?"

"네."

"야하다는 표현에 엄마도 동의하실까?"

"그럴걸요? 사실이니까. 어깨도 다 보이고 가슴도 파이고 치마도 짧고."

"아, 혹시 배우들이 시상식에서 입는 옷 같은 거랑 비슷하니?"

"그렇죠. 뭐 그렇게 비싼 옷은 아니지만."

"야하다는 말 대신 예쁘다거나 매혹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헐. 배우니까 그렇죠! (어이없다는 듯) 우리 엄마가 무슨 배우예요?"

"아, 미안. 근데... 엄마가 그런 옷을 입으시는 사정이 있으신가?"

"일 하느라 그렇죠. 아저씨들이 좋아하니까."

"아저씨들?"

"선아 이모라고 노래방 하는 이모 있는데 도와달라고 해서."

"그래?"

"근데 엄마 옷이 완전... (한숨을 쉬며) 휴! 완전 구려서 문제죠. 화장도 너무 심하게 하고."

"혹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으신가?"

"손님들이랑 술 마시느라 그러는 거예요."

"아, 그래?"

"입으려면 차라리 가게 나가서 갈아입으면 되잖아요. 쪽팔리지나 않게."

"아, 창피했던 적이 있구나?"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존나 짜증 나잖아요."

"사람들이 엄마를 나쁘게 볼까 봐 걱정돼서 짜증 났어? 아이고, 엄마는 좋겠네. 걱정해 주는 딸이 있어서."

"그리고 매일 열두 시도 넘어서 들어와요. 어떤 날은 새벽에 오고."

"아, 바쁘신가 보구나?"

"완전 꽐라 돼서 들어와요. (한심한 듯) 담배도 못 끊고. 큰일이죠."

"아, 그래서 걱정되는구나?"


"툭하면 토하고 아프고. 아, 진짜 왜 그러고 사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도 나름대로 그럴 사정이 있으신가?"

"그래야 돈 버니까."

"아, 그래?"

"근데 쫌... 그렇잖아요. 노래방에서 아저씨들이랑 술 마시고 노래하고. 창녀도 아니고."

저학년 아이들은 집에서 슬픈 일이 있어도 학교에 오면 잊는지 티가 잘 안난다. 그래서 누가 어떤 우울을 가졌는지 구별하기 어려운데 고학년이 되면 아무 걱정 없이 천진난만 자라는 아이와 무거운 삶의 무게로 흔들리는 아이가 제법 구별된다. 어둡고 화난 표정, 습관처럼 몸에 밴 짜증과 욕설, 퉁명스러워 시비를 부르는 말투가 그렇다. 이런 아이들의 흔들림은 불우한 성장 환경과 관련 있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의 경우는 가족 관계의 건강함에 따라 영향을 받고 중고등학생이 되면 개인의 학업, 정체성, 진로 문제로 옮겨가는 것 같다. 그저 마음속의 꼬인 감정을 풀어내게 도우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져 헤헤 웃는 저학년 아이의 상담과 달리 고학년 아이의 상담은 깊은 내면에 오래 고여있던 분노나 우울을 건드려주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금껏 자라면서 만들어 온 생각의 틀도 깨주어야 해서 조심스럽다. 시대가 변하면서 아이가 미디어에 많이 노출될수록, 아이들 방과 후 일상이 바빠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어려워질수록 상담이 필요한 아이도 많아 지는 것 같다. 아이가 마음을 미처 다 드러내지도 못한 상태에서 내가 섣부른 충고를 하면 아이가 마음을 다쳐 더 감추려 할 것이고, 그렇다고 아무 조언 없이 적당히 넘어가면 아이는 무기력해질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나조차도 감당이 안 되는 상담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창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아, 저... 그런 말이 아니라요. 노래방 도우미 그런 거 말고 다른 걸 하면 되는데."

"뜻을 알고 말한 거라면 괜찮아. 근데 그 말은 누구한테 들어서 안 거야, 아니면 네가 생각해 낸 거야?"

"(잠시 후) 아빠 집에 갔을 때 고모들이 하는 말 들었어요."

"음... 혹시 그 말 듣기 전에도 엄마가 하시는 일이 지금처럼 싫었니?"

"아뇨. 그땐 아무 생각 없었죠. 어리기도 했고."

"고모들이 심한 말을 하셨네. 근데 혹시 너도 고모랑 생각이 같니?"

"뭐... 근데 남자들이랑 술 먹고 그러면 창녀 맞잖아요."

"고모들은 왜 그런 말을 하셨을지 생각해 봤니?"

"엄마 욕하는 거예요. 아빠랑 이혼했으니까."

"너도 고모들처럼 엄마 욕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아뇨. 엄만 잘못 없어요. 우리 아빠가 잘못해서 이혼한 거니까."

"그럼 고모는 너 들으라고 그 말 한 게 아니라 아빠 편 들어주느라 일부러 창녀라는 표현을 쓰셨나 봐. 아이고, 엄마가 억울하시겠네."

"엄마도 잘한 건 없죠. 사실인데."

"고모들이 그렇게 말할 때 혹시 엄마 편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니?"

"아뇨? 제가 왜요?"

"아, 그냥. 엄마 편은 아무도 없는 거 같아서. 그럼 외롭잖아."


아이 엄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안 되어 아이를 낳았다. 그 일로 친정과 시댁에서 배척당했다. 경제 관념이 없던 아이 아빠와 다툼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폭행을 당하거나 유기되었다. 아이가 자기 핏줄인지 의심하며 그녀의 행실을 비난하는 지경이 되었을 때 둘은 헤어졌다. 아이는 정기적으로 아빠를 접견하는데 그럴 때마다 아빠 쪽 가족들이 엄마를 비난하는 말을 듣는다. 이혼하는 부부의 대부분은 유아기 아이의 선택권을 존중하지 않는다. 아이가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서이기도 하고 치열한 다툼 너머에 있는 아이를 볼 여유가 없어서일 것이다. 이혼 가정의 아이는 부모에 대해 중립적이거나 현재 양육하는 보호자 편에 서려고 애쓰지만, 이 아이처럼 양육자(엄마)에 대해 적대적인 경우가 있다. 어른들의 편파, 경솔한 말 때문이다. 아이의 고모들은 감정이 앞서 아이가 듣고 있다는 걸 잊었을 테다. 설마 아이와 엄마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일부러 창녀라는 말을 했을라고. 하지만 그 말 때문에 아이와 엄마는 깊은 생채기를 얻었다.


*

아이와 상담을 하는 내내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를 포기하고 서울 변두리 목욕탕에서 일할 때 알던 분이다. 제법 큰 목욕탕이어서 손님이 밀리는 시간이면 칫솔이나 면도기 등 일회용 목욕 용품이며 음료를 파는 중간에 때까지 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열일곱 살에 첫 직장이다보니 요령이 없어 일이 서툰 데다 숫기까지 없어 사장에게 야단을 자주 맞았는데 욕을 먹거나 쥐어박히기는 기본이었다. 특히 어려운 건 때를 민 손님에게 돈을 받는 일이었다. 때를 민 손님의 락커 번호를 기억했다가 손님이 가실 때 돈을 받아야 하는데 돈을 안 내고 가는 손님도 있었다. 그런 날엔 월급에서 깎이는 건 물론, 목욕탕 타일 바닥에 머리를 박곤 했다. 그래도 원래 그렇게 배우는 줄 알고 저항할 생각도 못하면서도 서러운 건 알아서 목욕탕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훌쩍이곤 했는데 그런 나를 다독여 준 사람이 그녀였다. 그녀는 목욕탕 지하 보일러실에 딸린 단칸 방에서 예닐곱 살 된 아이 하나를 데리고 살면서 여탕 청소를 맡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있다고 했다. 그녀의 아이는 낮이면 내가 일하는 남탕에 와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순하고 귀여워서 한가할 때마다 글자를 가르쳐주는 등 잘해주었다. 목욕탕과 여관 직원들은 모두 일곱 명이었는데 근처 식당을 정해 끼니마다 밥을 배달해 먹었다. 그러다 식당에 사정이 생겨 폐업하자 그녀가 밥값을 싸게 해줄 테니 자기가 식사를 맡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 후 우린 그녀의 지하방에 모여 밥을 먹었다. 식당밥과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그녀는 내가 일찍 아버지를 잃고 일을 하러 온 것을 안쓰러워했다. 뭐 하나라도 더 주려고 했고 늘 밥을 더 먹으라며 내 옆에 밥솥을 밀어주곤 했다. 특히 직원들이 나를 '뽀이'라고 부르며 하대하는 걸 안타까워해서 호칭을 바꾸라고 잔소리도 해주었다. 덕분에 나의 호칭은 뽀이 대신 성을 딴 '송군(宋君)'으로 바뀌었다. 당시 홀머니와 두 동생이 살던 우리 집도 빌라 지하 단칸방이어서였을까, 보일러실 옆이라 늘 따뜻하던 그녀의 방이 부럽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여러모로 내게 잘해주는 그녀에게는 이상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 더 있다는 걸 알면서부터였다. 그녀는 여탕 청소와 직원들 밥을 하는 것 말고 낮에는 대실이 끝난 여관방을 청소하고 밤에는 여관 손님이 부르면 동침했다. 그녀를 보면 나도 모르게 중학교 때 친구들과 몰래 숨어서 보던 도색잡지가 떠올랐다. 성호르몬이 왕성하던 시기여서 그랬는지 그녀의 그 일은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더 이해하기 힘든 건 그녀의 태도였다. 그녀는 그 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방을 청소하거나 밥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밥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동침에 대한 일을 소재로 웃긴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마 나는 그 순간에 순결, 순수, 깨끗함, 올바름이라는 말과 대척점에 있는 낱말을 떠올렸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 또한 그녀의 일에 대해 빠르게 덤덤해졌는데 다른 사람들의 반응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녀가 여관 손님과 동침하는 것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았다. 중년의 보일러 기사 아저씨와 군대 가기 전의 보조 기사 형, 삼십 대의 여탕 세신사 누님과 스물 중반의 남탕 세신사 형님은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그녀를 상대로 짓궂은 농담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녀의 이야기에 같이 웃고 넘어갈 뿐, 그녀가 불편해할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직 형기가 꽤 남은 남편 소식을 묻거나 어린 아들의 재롱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번은 누가 신고를 했는지 대낮에 경찰이 출동한 적이 있었다. 마침 동침 중이던 그녀는 옷도 못 입고 이불을 두른 채 계단을 내달려 가까스로 지하방으로 숨었다. 지하에 방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경찰은 여관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 그녀의 행방을 추궁했다. 아무도 말을 안 하자 나를 비롯한 목욕탕 직원들까지 불러 모으고는 당장 말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협박을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행방을 말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모두들 그녀를 아끼고 염려하고 있다는 걸.

그곳에 일 년 여 일을 한 덕 분에 다시 고등학교에 가게 되어 그곳을 떠나게 되었지만, 목욕탕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와 그녀를 감싸주던 사람들이 떠오르곤 했다. 사람들은 다들 어떤 일을 하는가를 두고 그 사람을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몸을 팔아 먹고사는 사람들에 대해 온정의 눈길을 보낸 예는 없는 것 같다. 사회적으로 약자인 그들의 취업 전선이 얼마나 냉혹하면 그런 일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까를 고민하기 전에 그들이 그런 일을 하므로 더럽고 천하다고 비난한다. 나 또한 남편을 감옥에 보내고 어린아이를 키워야 하는 그녀의 고단한 삶을 연민하기보다 싸구려 동침에 호기심을 느꼈다. 성매매에 대해 말할 때, 당사자인 성노동자의 박복한 현실을 보려 하지 않고 그들의 행위를 싸잡아 비난하는 걸로 도덕적 우월을 유지하려는 사람과 같은 것이다. 세계적인 교육열을 지녔고, 인문학 프로그램이 넘치는 지금도 성을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바뀌지 않는 듯하다. 그런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아이도 그런 방식으로 엄마를 대하는 것 같다.

"엄마가 하시는 일이 많이 싫으니?"

"싫죠. 좀 쪽팔리기도 하고. 애들이 노래방 갔다가 볼 수도 있고."

"그런 얘기 엄마한테 해 봤니?"

"엄청 했죠. 근데 들은 척도 안 해요. 괜히 말했다 욕만 먹었죠. 못된 년이라고."

"만약에 말이야. 엄마가 노래방 나가시는 거 말고 길거리에서 호떡 장사를 하시면 어떨 것 같아?"

"(고개를 저으며) 우리 엄마 그런 거 저얼때! 저얼때 안  걸요."

"사람 일은 모르는 거거든. 엄마가 나이가 더 드셔서 지금 일을 못 하실 수도 있고, 또 선아 이모가 노래방을 닫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 하겠죠. 돈은 벌어야 하니까."

"그럼 넌 노래방에서 아저씨들과 술 마시며 돈 버는 엄마가 더 좋을 것 같아, 길거리에서 호떡 팔아서 돈 버는 엄마가 더 좋을 것 같아?"

"호떡."

"왜 그럴까?"


"호떡은 창피하진 않잖아요."


"근데 호떡은 겨울에 잘 팔리는 거 알지? 그럼 추운데 길거리에서 장사해야 하는데."

"그래도 호떡 파는 게 더 낫죠. 창녀라는 말은 안 들으니까."

"네 생각에 만약 엄마가 더 이상 노래방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 호떡 장사라도 하실 거 같아, 아니면 아예 돈 벌기를 포기하실 것 같아?"

"(잠시 생각하더니) 호떡이라도 팔겠죠. 돈 벌어야 저를 키우니까."

"맞아. 너희 엄마는 그러실 거야. 너를 위해 뭐든 하실 거야."

"근데 왜 호떡이에요? 다른 것도 있는데."

"내가 네 나이 때 우리 엄마가 호떡 장사를 하셨거든."

"아..."

"추운 겨울에, 바람 쌩쌩 부는 밤에, 하나라도 더 팔아보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손님을 기다리는 엄마를 보는 게 난 괴로웠어. 만약 우리 엄마가 너희 엄마처럼 노래방에 갈 수 있었다면 차라리 그러길 바랐을지도 몰라."

"사람들이 창녀이라 그러면요?"

"신경 안 쓸래. 난 우리 엄마 편이니까."

"..."

"가끔 학교에 늦게 오던데, 엄마가 늦게 들어오셔서 늦었니?"

"네."

"그럼 너 혼자 일어나서 씻고 밥 챙겨 먹고 학교 왔어? 아이고, 기특해라! 그러고 보니 너 벌써 엄마 생활에 적응했구나?"

"(입술을 깨물며) 할 수 없죠. 엄마가 팔자라고 생각하래요."

"그래? (웃으며) 엄마 말대로 팔자라고 생각하면 기분이 어떠니?"

"(따라 웃으며) 기분 존나 더럽죠. 킥킥."

"그러게. 그렇겠다. 근데 나중에 고맙게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아. 나도 우리 엄마 호떡 장사할 때 친구들이 지나가면 창피해서 못 본 척했거든. 아이고, 옛날 얘기다."

"선생님 엄마 지금 뭐 하시는데요?"

"완전 할머니야. 여든둘이니까 너네 할머니보다 연세가 많지?"

"호떡 장사 오래 하셨어요?"

"아니, 호떡이 여름엔 안 팔리잖아. 그래서 옷 공장도 다니시고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시고 남의 집 가사도우미도 하셨어."

"헐. 힘드셨을 듯요."

"응. 나를 키우시려니 별 수 있나? 게다가 우리 나라에서 여자는 돈 벌기 더 힘들잖아. 우리 엄만 돈을 벌 수 있다면 뭐든 하셨어. 내 생각에 너희 엄마도 그러실 거 같은데?"

"그렇겠죠."

"그래. 너처럼 예쁜 딸이 돈 때문에 하고 싶은 걸 못 할까 봐. 지금은 네가 엄마 일을 싫어해도 나중에는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하실 거야."

"네. (잠시 생각하더니) 근데 왜 꼭 그렇게까지 그런 일을 하냐구요."

"너를 낳으실 때 결심하셨을 거야. 어떤 일을 해서라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너를 잘 키우겠다고. 그래서 남들이 이상하게 봐도 흔들리지 않으실 거야."


"음...뭐, 그럴지도요."


"그럴 거야. 엄마들은 다 그래. 우리 엄마도 그랬어."



Reginald Bottomley (1856–1933). 아기를 안고 성모 그림을 보는 어떤 엄마.

잠든 아기를 안고 있는 저 가난한 엄마는 성모를 보며 무엇을 기원했을까.  중 어느 하나가 더 위대한 엄마라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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