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스크리나라는 회사에 다닐 때 웨스 앤더슨의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온라인으로 상영하고 GV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이후 영화를 풀어 쓴 글을 당시 회사가 운영하던 카페에 올린 적이 있었는데, 부끄럽지만 조심스레 브런치로 옮겨봅니다.. 최대한 쉽게 풀어쓴 얕은 글이니 편하게 읽어주세요!)
1. 웨스 앤더슨의 가공된 세계
뻔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영화사 초창기, 영화는 움직임을 찍는 사진이라는 뜻의 '무빙 픽쳐'라는 단어로 불리기도 했어요. 현실 세계에 있는 인간, 사물의 움직임을 화면으로 옮겨올 수 있는 '기록 매체'로서의 영화에 사람들은 매우 열광했죠. 쉽게 말해 영화 속에는 '현실'과 똑같은 '새로운 현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곧 영화는 시작부터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그 본질적인 속성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최면이기도 하고요! 영화를 보며 꼭 영화 속에 재현되어 있는 현실을 사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
그런데 모든 실사 영화가 정말 현실을 재현할 수 있을까요? 꼭 CG를 통해 영상 속 화면을 재구성하는 무수한 영화들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대중을 향하는 대부분 영화는 그 시나리오에서부터 현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는 지루한 부분이 커트된 인생이다"라는 히치콕의 말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영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명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대부분의 (상업)영화들은 관객에게 꼭 영화 속 세계가 현실인 것처럼 속삭이며 그들의 감정을 끌어냅니다.
왜 이런 지루한 이야기를 했냐면, 웨스 앤더슨이 만드는 영화 속의 세계는, 현실을 모방하려는 시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웨스 앤더슨이 그려낸 강박적인 대칭, 파스텔 톤의 색감, 일정한 톤의 연기들이 현실과 닮아있나요? 그렇지 않죠. 오히려 웨스 앤더슨은 자기가 만든 세계가 얼마나 가공되어 있는지를 더 드러내는 감독입니다. 눈썰미가 좋은 분들이라면 <그부페>의 초반 호텔 정경이 미니어처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을 텐데요. 그는 그걸 CG로 처리해서 현실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감독이 아니에요. 그게 미니어처라는 게 티나는 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태도. 그는 영화에서 그림을 자주 쓰고, 때로 그 그림은 현실을 침범하기도 합니다. 그러다 특정 장면은 화면 자체가 하나의 화폭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왜 웨스 앤더슨은 이렇게 영화를 찍을까요? 저는 가끔 그가 영화를 찍는 가장 큰 목적 중 하나가, 자기가 사랑하고 흠모하는 상상 속의 세계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에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현실을 재현하고 모방하는 것보다, 자신의 취향으로 예술적이고 허구적인 세계를 가공해내는 것이 영화가 가진 가능성을 훨씬 더 존중하는 방향이라는 것처럼. 즉 때론 거짓의 세계가 훨씬 진실될 수 있다는 모순적이고도 단순한 미학이죠.
2. 대칭적인 화면으로 만들어내는 깊이
그런 점에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대칭적인 화면'을 조금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먼저 짚고 갈 것은 '대칭적인 화면'이란 일반적으로 '평면적'으로 화면을 만들기 위해 쓰인다는 점이에요. 이건 조금만 생각해봐도 당연한 게, 대부분의 영화는 인물과 배경을 사선에서 찍죠. 깊이감이 없는 2D 스크린에 3D인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입체감을 표현해야 하니까요. 정면에서 찍은 화면보다 사선에서 찍은 화면은 당연히도 입체감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속성을 뒤집어서, 몇 몇 감독들은 대칭적인 화면 연출을 통해 반대로 깊이감이 없는 화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그부페>를 보면서 느끼는 놀라운 점 중 하나인데, 이 영화는 강박적으로 대칭을 유지하면서도, 매우 깊이있는 화면을 만들어냅니다. 먼저 정말 아무거나 캡쳐해 온 이 장면 하나를 볼까요. 이 장면의 연출적인 핵심은 뭘까요? (물론 여기서 구스타브와 제로가 하는 대사 역시 웨스 앤더슨의 문학적인 면을 드러내지만, 그건 다음 글에서 다뤄볼게요.) 바로 저 아래로 삐져나온 손과 발입니다. 사실 이렇게 위에서 인물들을 대칭적으로 찍었을 때, 만약 아무것도 없이 바닥이 보였다면 이 화면은 깊이가 느껴지지 않는 납작한 화면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웨스 앤더슨 감독은 저 아래에 손과 발, 그리고 불빛(심지어 이야기 중간에 플래쉬를 한 번 슥 비추기도 합니다)을 통해 이렇게 평면적인 대칭 구도에 깊이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지나가는 불빛까지 !
사실 정말 수십 개의 예시를 들고 올 수 있지만, 이 영화는 대부분의 화면에서 다층적인 깊이를 만들어내요. 카메라가 문과 문을 통과하고,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서 수직과 수평으로 이동하고, 액자 형식을 구현하고, 위에서 찍은 부감숏을 활용하는 등 강박적인 대칭 구도를 유지하면서도 웨스 앤더슨만의 참신한 연출력으로 끊임없이 입체적인 화면을 관객에게 제시합니다. 몇 장면만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영화를 넘겨가면서 아무 장면이나 가져왔어요. (무수한 장면들이 예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이 장면은 구스타브와 제로가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그림을 훔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에요. 기둥 사이에 문을 놓고 그 안에서 문을 또 열고 들어가는 모습까지, 2중 3중으로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모습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에 이런 식의 연출이 얼마나 많이 등장하는지 느끼실 거예요!
이 장면에서는 화면 뒤에 창문을 배치해, 메인으로 들리는 구스타브와 제로의 대화 외에도 다층적으로 이야기가 펼쳐져 있죠. 저 부엌에서 하녀와 집사 서지 X가 무언가 다급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거든요! 이렇게 화면 안에 또 하나의 세상을 펼쳐놓는 것 역시 영화에 자주 나오는 연출이죠.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호텔 복도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마담 D의 방으로 들어가는 구스타브를 보여주기 위해 반대편 복도를 보여주며 점점 줌 아웃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반대편 복도로 돌려 제로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죠. 카메라의 운동과 더불어 소실점이 하나로 모이는 복도의 구조를 통해 깊이감을 이끌어냅니다.
또 정말 재밌었던 케이블카 장면도 마찬가지예요. 이 장면의 모든 숏을 다 가져오고 싶지만 핵심적으로 네 개만 캡쳐를 했어요. 먼저 이 첫번째 장면만 보면, 뒤에 설원이 보이기는 하지만 저는 꽤나 평면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케이블카가 등장(두번째, 세번째 캡쳐)하면서 화면에 갑자기 입체감이 생겨요. 그러더니 조금 뒤에 이 두 케이블카 사이를 부감숏으로 보여주고 그 사이를 제로와 구스타브가 지나가면서 입체감을 강조합니다.
또한 캡쳐를 위주로 설명하다보니 카메라 워킹을 제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카메라의 운동 역시 이러한 입체적이고 가공된 세계에 복무합니다. 카메라는 마치 도르레에 실린 것처럼 수직과 수평으로 딱딱 맞춰서 움직이고, 그건 대체로 인물들의 동선과 겹칩니다. 곧 인물들의 동선 역시 90도를 기반으로 이루어져 있는 가공된 움직임이 많다는 이야기. 그에 더해 1.37:1 이라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화면비를 살리는 수직적인 공간 구조와 움직임 역시 화면 구조와 완벽하게 호응하죠. 정적인 화면의 연속이면서도 그 안에 깊이감이 있고, 간단한 틸딩과 패닝만으로 영화 속의 온갖 추격전을 감질맛 나게 연출해내는 걸 보고 있다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3. 현실과 동떨어진, 하지만 현실보다 가까운
제가 <그부페>를 좋아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설명한 이런 연출들이 웨스 앤더슨이 표현하고자 하는 지점과 정말 아름답게 맞물려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웨스 앤더슨은 이 영화를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만들었죠! 곧 이렇게 입체적인 서사 구조가 입체적으로 구현된 화면과 꼭 닮아있습니다.
또한 글 초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웨스 앤더슨은 이 세계를 상상과 취향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만들어낸 '깊이감'이란, 우리가 사는 일상 세계가 가진 속성을 재현해내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 웨스 앤더슨은 우선 화면의 대칭구조와 인물/카메라의 동선을 통해 현실과 거리두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저렇게 대칭적인 화면은 현실처럼 보이지 않죠. 저 역시 현실 세계와 유리되어 있는 영화 속 세계에 처음엔 모종의 거리감이 느껴졌구요. 하지만 그런 화면 안에 의외의 액자 구조와 공간적인 부피감을 주면서 영화를 더욱 다채롭고 환상적인 동화(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다운)로 만들어냅니다. 그 안에는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의 특성을 활용한 그만의 독창성이 세세히 녹아있어, 저는 웨스 앤더슨이 (재현이 아닌) 구현한 세계를 감정이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황홀의 느낌으로 바라보게 돼요. <그부페>는 그렇게 관객과의 거리를 새롭게 좁혀냅니다.
제게 웨스 앤더슨의 가공된 세계는, 현실을 닮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와닿고야 마는, 정말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숨쉬고 있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웨스 앤더슨의 예술은 그가 그려낸 시대 속에 오롯이 살아 숨쉬며 불멸하는 이야기로 남아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시대에 따른 화면비와 그 안에 든 <그부페>의 이야기적 속성, 그리고 영화에 녹아있는 예술관과 사랑까지 조금 더 서사와 주제 측면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202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