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C Apr 04. 2024

시절의 편린을 주워온다는 일

롭 라이너, <스탠 바이 미>

(2018)


※ 스포일러가 있어요


<스탠 바이 미>의 이야기는 철로에서 시작해 철로에서 끝난다. 소년들은 실종된 아이의 시체를 찾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마을을 벗어난다. 철로를 따라 하루를 꼬박 걸어갔다가, 다시 하루를 꼬박 걸어 마을로 돌아온다. 그리고 전부라고 생각했던 마을이 작아졌음을 느낀다. 곧 그들의 세계가 커진 것이다.

<스탠 바이 미>는 소년들의 이야기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지만, 더 이상 아이일 수는 없는 소년들. 그들은 저마다의 모순을, 그것이 모순인지도 모른 채 품고 있다. 테디(코리 펠드만)는 정신 나간 아버지 때문에 귀를 태워먹을 뻔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그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참여했던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고자 발악한다. 늘 과묵하게 친구들 곁을 지키는 크리스(리버 피닉스)의 마음 역시 복잡하다. 그는 평판이 바닥인 가족 때문에 억울한 누명을 쓴다. 눈물을 흘리며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크리스는 자신이 마을을, 가족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쉽게 체념한다. 고디(윌 휘튼)는 죽은 형의 그림자 아래에 있다. 모든 것이 완벽했던 형이 너무 그립지만, 상실에 빠진 부모님은 고디에게 애정을 주지 않는다. 형을 대체할 수 없다는 무의식 속에서 고디의 내면은 점차 망가진다.

그러니까, 또는 그럼에도 그들은 소년이다. 아직 완성되지도 망가지지도 않은, 작가가 될 수도 범죄자가 될 수도 있는. 비가 되어 사라질 수도, 눈이 되어 쌓여갈 수도 있는 진눈깨비들. 소년인 그들은 어제보다 어지럽다. 시체를 찾으러 가는 여정은 그러한 이들의 마음을 반영한다. 친구들은 처음에는 마냥 호기심으로, 영웅이 되겠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체를 찾으러 나선다. 하지만 한낮의 시간이 지나 어두워지는 공기 안에서, 소년들은 죽은 레이 브라워를 떠올린다. 무거워진 발걸음보다 그 마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특히나 고디, 이 여린 소년은 바로 그 또래 소년의 죽음에 손쉽게 이입한다. 고디는 레이 브라워의 죽음을 통해 형의 죽음이 가져다준 뜻 모를 죄책감을 스스로에게 겨냥한다. 그렇게 고디는 그로서는 당연한 결론에 이르러 고백한다. 내가 죽었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 말이 가진 순수한 아픔은 역설적이게도, 고디가 자기 자신도 모르게 깊어져 간 내면의 상처를 마주하도록 이끈다.

소년은 '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커서 소년이 될 거야'라고 말하는 아이는 없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러니 소년은 아이와 어른 사이에 존재하는 불투명하고 불분명한 '상태'에 불과하다. 소년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없다. 어쩌다 떨어진 한 장의 백지 위로 무수한 선이 그려져 왔고, 소년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먼 이야기. 소년들은 왜 내가 아픈지를 아직 알지 못한다. 상처를 받을 줄은 알지만, 치유할 줄은 모르는 이들.

그러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나 대신 나를 알아봐 주는 존재다. 내가 이상하냐 묻는 고디에게 크리스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게 뭐 어때, 다들 이상해. 아빠는 나를 싫어한다며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고디에게, 크리스는 그는 너를 모른다고 대신 외친다. 마지막으로 크리스는 고디에게 주문처럼 말한다. 너는 작가가 되어야 해. 때로는 그런 말 하나가 어떤 미래를 결정지어 버린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고디는 그 순간 자신의 존재가 무형의 상태에서 무언가로 조물 되는 것을 느꼈으리라. (같이 대학 진학반에 가자며 자신의 가능성을 믿어주는 고디의 말에 크리스가 느꼈을 감정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크리스의 언어는 고디가 시체를 목숨 걸고 지켜낼 수 있는 힘으로 변환되었을 것이다. 형 대신 자기가 죽었어야 한다고 말하던 고디가, 시체를 지켜냈다. 그러니 고디가 지켜낸 사람은 죽었어야 할 자신이었다. 그는 아빠의 무시로부터 느꼈던 끔찍한 자괴에서 자신을 구해내야 했다. 몰래 지켜오던 가능성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아야 했다. 크리스를 지켜내야 했다. 삐쩍 마른 곱상한 소년이 손에 총을 들고 쌍욕을 내뱉으며 성장하는 이야기라니. 이 영화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한 이 여정에서 고디는 오로지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삶의 순간을 포착해 냈다. 그냥 살아가는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을 이고 죽음을 향한 길에 나섰던 그가 길목에서 발견한 사슴의 눈동자가 그것이다. 그 깊이를 끝없이 응시하던 고디는 내면에서 일렁이는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아마 누구도 그 오묘한 감정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그는 그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소중히 간직해 갔다. 나만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장면이 한장씩 쌓여간 둔덕을 딛으며 소년은 성장해 가는 것일 테니.

고디의 이야기는 시체 앞에서 새롭게 출발했고 사슴의 눈동자를 뿌리 삼아 발현되었을 것이다. 조금은 어른이 되어가기 시작한 열 두살 언저리,  고디의 세계는 성큼 미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언젠가 조금 더 나은 어른이 '되어서야', 소년은 끝내 추억으로만 무언가가 '된다'. 소년이 될 거라고 말하는 아이는 없지만 돌이켜 보니 나는 소년이었던 것이다. <스탠 바이 미>는 소년의 이야기는 소년의 눈으로는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하는 영화다. 언젠가 그때를 회상할 수 있는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묘사될 수 있는 시절. 그러니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만들어져 있었고 과거로 돌아가 시절의 편린을 주워오는 것만이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것이다.

다만 아직 나의 세계가 만들어지기 전 추억은 벌써 만들어지고,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을 나눴던 친구들에게 오히려 지금의 나를 이야기할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어른이 된 고디가 말하듯, '친구들도 식당의 일꾼처럼 내 인생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12살 시절의 친구 같은 친구를 다신 만나지 못했다는 말만큼이나 그런 친구가 식당의 일꾼처럼 사라진다는 말은 얼마나 더욱 아련한가. 아픈 게 아니라 아련하다. 사이코 안경잡이 테디와 순진무구한 뚱보 번은 고디에게 다시는 친해질 수 없는 친구들이다. 그는 더 이상 구피의 정체에 대해, 마이티 마우스와 슈퍼맨의 싸움에 대해 진지하게 얘기할 수 있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마을 바깥으로 뛰쳐나와야만 하는 순간을 겪는다.

놀라운 은 그 친구들 중 정말 일부만이 나란 사람에 대해 터놓을 수 있는 친구로 남는다는 이다. 그와는 어린 시절의 추억뿐만 아니라 그 뒤의 시간도 함께하게 된다. 내게도 그런 친구가 있다. 고디에겐 크리스였고 크리스에겐 고디였다. 이건 대체 어떤 기가 막힌 우연의 조화일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그런 일을 겪게 할까. 그 친구가 그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너랑 나는 어릴 때부터 서로의 가치관이 생기는 모습을 지켜보고 성장기를 함께하며 친구가 됐는데 이제 어느 정도 어른이 되어가면서는 더 이상 그런 친구를 사귈 수는 없나 보다고. 맞는 말이었다. 그것이 '12살 시절의 친구 같은 친구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는 말의 또 다른 의미다. 고디는 테디와 번 같은 친구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 같은 친구 역시 만나지 못했다. 홀로 지새우던 밤을 지켜주며 서로의 성장기에 불침번이 되어주었던 친구는, 터널을 빠져나오듯 우리가 어른이 되고 난 뒤에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당연한 거라고. 그렇지만 그렇게 만들어온 우리의 세계 자체를 공유하고 지지해 줄 누군가를 만나는 게 최선이지 않겠냐고.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의 전부였다.

잠시 생각해 본다. 소년들의 여정은 어디로 향하고 있었나.

그 여정을 따라 밟으며 내가 도착한 곳은 어디였을까.


_


2018년 나는 이런 글을 썼지

그랬지

소년소년 귀엽네,,

매거진의 이전글 아주 큰 것부터, 아주 작은 것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