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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Feb 15. 2022

[열 번째 겨울]


오늘도 나는 한기에 눈을 뜹니다.


옆에서 누군가 뒤척이는 기미도 없이 혼자 적막 속에서 눈을 뜨게 된 지도 어느새 꽤 되었네요.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밥을 짓는 일입니다. 하루 세 끼를 먹고 나면 딱 동이 날 양의 쌀을 찬물에 몇 번 휘저어내고 손등 위가 얼추 찰박 해질 때까지 새 물을 맞춥니다. 밥 물 맞추는 걸 유독 어려워하는 나를 위해 찬물에 기꺼이 손등을 담갔을 당신을 매일 아침 새 밥을 지으며 떠올려요. 이제는 고슬고슬한 밥을 나도 제법 잘 짓습니다.


마주 앉아 도란도란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을 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걸 그랬다는 후회도 많이 했지요. 이제는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마다 그저 한번 결심하고 맙니다. 잊지 않고 기억해뒀다 후일 만나면 꼭 이야기해줘야지 하고 말이에요. 당신이 듣는다면 칠칠치 못하다고 나를 탓하고 혀를 찰만한 얘기들이 제법 쌓여 있습니다.


그래도 꼭, 잔소리를 하고 난 이후에 한 번 더 나를 챙겨주던 당신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지요. 그러면 아이 취급을 한다고 도리어 목소리를 높이던 나지만 그런 자상함이 나는 정말 좋았습니다.


공교롭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던 계절과 당신이 떠난 계절이 같은 계절이 되었어요. 당신이 그걸 알게 된다면 아마 몹시도 미안해하겠지만요.


네. 조금은 미안해해 주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 덕에 내가 가장 사랑하던 겨울이 내게 가장 공허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던 당신이라 더욱이 겨울은 아니었으면 하고 고집을 부렸던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사람은 죽으면 자기가 떠난 계절 안에서 영원히 잔다는데 하필 겨울이라니요.


아직 냉기가 덜 가신 봄바람이나 제법 쌀쌀해진 가을바람에도 맥없이 앓던 당신이라서 한동안은 견디지 못할 정도로 염려가 되었습니다. 긴 시간을 누워서 지내느라 꽃이 피는지, 눈이 내리는지 당신은 알지 못했겠지만 가끔은 내게서 가장 예쁜 계절을 앗아간 당신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당신이 있는 겨울은 어떤가요, 내가 남아 있는 겨울보다 따뜻한가요? 내가 이만 걱정을 내려놓아도 될지요.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눈 예보가 있더니 해질 녘이 다 되어서야 눈발이 날립니다. 이제 내게 겨울은 견디기 힘든 계절이 되었지만 어여쁜 눈발마저 미워하기는 어렵더군요. 졸음도 참아가며 눈 구경을 하던 우리가 생각나서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 구경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같이 졸음을 참아주던 당신이 말이에요. 커다란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원 없이 눈 구경을 하고 있으면 그렇게 졸음이 그득한 눈으로 내게 따뜻한 담요를 둘러주던 당신이요.


당신이 없는 집에서 나는 기어코 열 번의 겨울을 더 살아내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가장 마음에 고이는 것은 평범한 것들입니다. 삶에 치여서 미루고 미루기만 했던 둘만의 여행이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근사한 식당에서의 식사가 아니라 더 눈 맞추고 더 귀담아듣지 못한 아주 단조로운 시간들입니다.


허락될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당신과 한 번 더 단조롭게, 그렇지만 더욱 다정하게 살아보고 싶습니다. 이미 나는 당신이 멈춰버린 나이보다 여덟 살을 더 먹었으니 그럴 수 있게 될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 기대마저 됩니다.


죽음이 기대된다니 당신이 못마땅해하는 표정이 눈에 선해 실없이 웃음이 나기도 하네요.


40년을 함께 했지만 단 하루도 지루하지 않았다, 말해 줄 수 있을까요?


오늘은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혼자서 눈 구경을 하려고요. 당신이 남겨준 담요를 두르고 감기에 들지 않게 조심해 보려고요.


2022년 1월,

여전히 당신을 그리워하며

열 번째 겨울을 보내는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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