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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니 Feb 20. 2022

[행운의 번호]



돌아가신 아버지가 처음으로 꿈에 나왔다.


평생을 노름에 빠져 도박 빚을 독촉하는 빚쟁이들에게 쫓겨만 다니던 아버지는 꿈에서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본인의 용건만을 말하고 있었다.  


'얘, 진호야. 아비가 시간이 별로 없응께 얼른 받아 적어! 3, 7, 14! 16! 29! 30!!!’


꿈인 걸 아는데도 그 순간 본능이 외쳤다. 이건 무조건 받아 적어야 한다. 허겁지겁 겉옷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낸다. 평소엔 이런 샌님 같은 물건은 들고 다니지도 않는데 무의식 속에서의 나는 준비성이 철저하다. 아주 아주 기특하다.


'얘, 진호야 딱 한 번만 더 부를랑게!! 3, 7, 14, 16, 29! 30!!!’


특히 마지막 숫자가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꼭꼭 씹어 슬로 모션처럼 외치던 아버지는 어디선가 나타난 장정 두 명에게 양팔을 붙들려 자욱한 안갯속으로 끌려가버렸다.


‘아부지! 세 번째가 16 맞아요? 아부지!!’


받아 적기만 바빠 제대로 불러보지도 못한 아버지를 뒤늦게 찾아보지만 아버지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부지!!!"


그 어느 때 보다도 애절하고 격렬하게 아버지를 외치며 잠에서 깼다. 꿈인 줄은 알았지만 역시나 꿈이다. 한여름 타는 해는 코딱지만 한 옥탑방을 더욱 숨 막히게 한다.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에만 의존해 누워있었는데 끈적하고 불쾌한 장판 위에서도 잠이 들어버렸던 모양이다.


아이고, 아부지. 저승에서도 그렇게 끌려다니시는군요. 생전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요단강 건너의 모습에 안타까움과 평생을 느껴본 적이 없던 효심이 샘솟는 것도 잠시, 재빨리 주변을 더듬는다. 잊어버리기 전에 적어야 한다. 급한 대로 벽에 걸린 종이 달력의 귀퉁이를 찢는다. 잉크가 전부 굳어 잘 나오지도 않는 펜으로 여섯 개의 숫자를 허겁지겁 적는다.


적어두고 보니 오히려 숫자들이 더 선명해지는 기분에 등골이 찌릿하다.

돌아가시고 처음 꿈에 나온 건데 강녕하시냐는 안부 인사 한 마디 없이 다짜고짜 팩트 체크만 요구한 자신도 참 볼만 하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건 계시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다. 가끔은 차라리 홀어머니와 지내는 친구들이 부럽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던 사람. 이번엔 달라지나 싶다가도 역시나, 이젠 정신 차려야겠지 싶었다가도 그럼 그렇지를 반복하게 하는 사람. 군 전역 후 번듯하진 못하지만 자그마한,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회사에 취직해 한 달 동안 철야를 하며 첫 월급을 받았을 때, 갚아야 할 빚이 있다며 그 돈 마저 가져간 사람이 아버지였다. 이제야 제대로 된 부모 노릇을 좀 하시는군요.


기세 좋은 대낮의 열기가 성실하게 데워놓은 찝찝한 마룻바닥을 박차고 일어났다. 무릎이 다 나오고 닳을 대로 닳아 엉덩이에서는 광택이 나는 트레이닝복 바지에 다리를 한 짝씩 차례로 욱여넣었다. 머리로는 근처에서 가장 명당으로 소문난 복권방이 어디였는지 되새기는 중이었다.


당첨금을 받으면 일단 무조건 집부터 마련해 이 지긋지긋한 옥탑방을 가장 먼저 벗어날 테다. 보증금 500에 25만 원짜리, 요즘 보기 드문 알뜰한 시세의 집이지만 주인 할아버지가 매우 고약하고,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바깥 온도보다도 한 발 더 나가는 이곳은 사람 살 데가 아니라는 걸 정확히 입주 일주일 차에 알았다. 그리고 나선 어머니한테 전셋집을 얻어주고 차를 한대 사야지. 당첨 사실은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게 할 생각이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벅찬 미래에 벌써부터 달큰한 꿀 내음이 나는 것 같다.   


눈앞엔 갓 배달된 짜장면과 탕수육 대자, 그리고 시키진 않았지만 함께 달려온 서비스 군만두가 놓여있다. 들뜬 마음에 누리는 호화스러운 밥상. 짜장면을 크게 한 젓가락, 탕수육까지 한 조각을 베어 물고 리모컨으로 TV를 켜 복권 추첨 방송에 채널을 맞춘다.


생애 처음으로 발휘해보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이번 주 행운의 번호는 4, 8, 15, 17, 30, 31! 축하드립니다!"


에라이, 믿을 사람을 믿지.

개꿈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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