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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Nov 22. 2020

소다맛 아이스크림

#초엽편소설 | 뭔가 되게 먹고 싶을 때마다 이야기를 짓기로 했습니다.


냉동고 속에 들어온 지 어느덧 백 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소다맛 아이스크림은 막바지 더위가 반짝 기승을 부리던 9월 초에 입고됐다. 여름 끝물에 들어온 아이스크림은 여느 계절보다 오래 냉동고 속에 머무르기 마련이었다. 그중 소다맛은 연간 빙과 판매 순위 10위를 웃도는 스테디셀러 아이스크림이었다. 한여름 때처럼 불티나게 팔리진 않아도 찾는 사람은 꾸준히 있을 그런 상품. 여름 끝물이라고 재고를 안 채워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재고는 다 소진된다.’ 무인 아이스크림 숍 주인이 소다맛 아이스크림에 거는 상업적 기대치는 제법 높았다. 그러던 것이 벌써 석 달이 지났다. 소다맛 아이스크림은 슬슬 자신의 처지가 질리기 시작했다.


‘올겨울 엄청 춥대요.’ 항간에 이런 말이 떠돌기 시작한 게 9월 말쯤이었다. 추위는 매년 갱신되는 것 같지만 작년처럼 ‘올겨울 따뜻하다던데’라는 풍문이 실현될 때도 있다. 하지만 방점은 풍문의 적중률에 있었고 매일 오락가락하는 일기예보와 달리 추위, 더위에 관한 풍문은 적중률이 꽤 높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올겨울 엄청 춥대요’가 현실이 된 12월 중순이 되자 빙과류는 이번 F/W 시즌 가장 안 팔리는 상품으로 등극했다. 역시즌 세일도 안 먹히는 아이스크림. 내년 여름에 예쁘게 입을 생각으로 지난 시즌 여름옷을 쟁여놓는 일은 많지만, 내년 여름에 맛있게 먹을 생각으로 냉동고 가득 아이스크림을 쟁여 놓는 일은 없었다. 무인 아이스크림 숍에서는 빙과 하나당 몇백 원에 팔았으니까, 미리 쟁여놓는다고 크게 이득 볼 일도, 그때그때 사 먹는다고 크게 손해 볼 일도 없었다.


올겨울은 얼마나 길까. 냉동고에 여러 달 있자니 몸에 성에가 붙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소다맛 아이스크림에게 성에란 상품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불명예스러운 표식이었다. 돌아누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껍질 소리와 함께 성에가 후두두 떨어졌다. 곱고 하얀 성에 가루가 몸을 감싼 비닐 포장 안쪽에서 탈탈거릴 때마다 아이스크림은 세상에서 제일 차가운 침낭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됐다. 아이스크림은 태어났을 때의 모습 그대로 자신을 견고하게 지켜주는 냉동고의 온도를 사랑했다. 필요에 의해 시작된 사랑도 사랑일 수 있다는 걸 아이스크림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달이 더 지나 1월 말이 다 되어가도록 아이스크림을 집어 가는 사람은 없었다. 말이 스테디셀러지, 아이스크림이 제 소임을 다하는 때는 1년에 여름 석 달이 전부였다. 아이스크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찬 것에 환장하게 만드는 그 안달 난 무더위가 애틋했지만 두려웠다. 녹기 위해 태어났어도 녹기를 재촉당할 때면 숨이 가빠왔다. 이따금 가게 문밖으로 강아지 짖는 소리나 아이들 웃음소리가 가끔 웅웅대며 들려오기는 했지만, 가게로 들어와 냉동고를 열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소다맛 아이스크림은 겨울옷 차림의 인간들이 형형한 눈빛으로 냉동고를 헤집는 모습을 상상하며 잠이 들었다. 잠결에 인간들의 옷이 점점 얇아지다가 봄이 되었고, 자신의 몸에 붙은 성에가 녹아 없어지는 꿈을 꾸었다.


빼꼼 빼꼼 누워서 냉동고의 유리 상판을 기웃거리던 어느 , 갑작스러웠지만  그랬다는 듯이 냉동고 문이  열리더니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손은 소다맛 아이스크림이 아닌   칸에 있던 쥬시 아이스크림을 집어갔다. 몸이 살짝 녹을  같던 희열도 잠깐, 다시 냉동고가 닫혔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분명 냉동고를 닫은  입구 옆에 있는 계산대에서 삑삑, 바코드 찍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왔구나.  인간. 겨울 되기 전까지 여기 잔류하던 몇몇 녀석들이 얘기하던  아이스크림 도둑. 한동안 도난 방지랍시고 아르바이트생을 써서 무인 아이스크림 숍의 정체성을 흐리게 만들었던  원인 제공자. 소다맛 아이스크림은 오랜만에 설렘을 느꼈다. 그토록 잡히지 않고 꾸준히 훔치려면 방문주기를 예측할  없어야  것이다. 오늘처럼. 예고 없이 나를 픽업 해갈 도둑의 손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 올지도 모를 손님을 기다리는 일보다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이제 슬슬 몸이 녹을 때가 왔다. 열렸다 닫힌 냉동고 문틈으로 잠깐 새로운 냄새가 유입됐다가 흩어졌다. 바깥공기의 냄새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었다.


2020.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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