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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Nov 20. 2017

나의, 안산

무연고 도시에서 살아낸 3년 6개월의 시간

대구를 떠난 후 첫 회사가 있던 홍대 쪽에 터를 잡고 4년을 살았다. 집 밖으로 조금만 나가도 없는 게 없던 번화가였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는 더 짙어지는 법. 밖이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집에서의 고독과 외로움은 더 무거워졌다. 처음엔 고시텔에 살아서 그런 줄 알았으나, 고시텔 생활을 청산하고 친구와 같이 살아도 마찬가지였다. 번화가와 떨어진 주거 단지에 살고 싶어졌고 이사를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4년 전인 늦가을, 서울을 떠나 안산으로 오게 된 건 한순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직장 때문에 옮긴 것은 아니었다. 매일같이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도시에 오게 된 건 우연이었지만 지내면서 점차 정을 붙여갔다. 약간 촌스러운 소도시의 분위기가 내겐 친숙하고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5층짜리 주공아파트,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한때의 번화했던 시절을 추측할 수 있는 '00프라자'류의 상가 건물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동네 주민들만의 먹자골목 같은 것들. 꼭 나 어릴 적 살던 대구 서문시장과 달성공원 부근의 풍경과도 닮아 있었다. 값싸고 세련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동네. 안산이 지니고 있던 익숙한 소도시 정서가 마음에 들었다. 조금은 빛바랜 주거 단지를 뚜벅뚜벅 두 발로 다니면서 안산 곳곳의 지리를 익혔다. 그리고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었던 상록수역 주변에는 '상록수'라는 이름에 걸맞게 공원과 녹지 시설이 많았다. 정비가 잘 된 자전거 도로도 이 역 주변에서 시작됐다. 그 푸르른 초록 길은 상록구를 돌아 단원구까지 이어졌다. 호수공원과 화랑유원지도, 여름이면 초록이 아닌 곳이 없었다. 덕분에 더 부지런히 누비며 이 도시에 정을 붙일 수 있었다. 처음 이사 갈 때만 해도 그렇게 오래 살게 될 지 몰랐으나 어떻게 해서 3년 6개월을 안산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중 3년의 시간을 세월호 이후의 도시에서 살아냈다. 


세월호 이후의 안산이 된 2014년 4월. 온 도시에 넘치도록 만연하던 슬픔을 기억한다. 길 가는 어디에나 걸려 있던 근조 현수막과 노란 리본. 사람들의 얼굴에는 그런 큰 비극이 일어났다는 걸 실감하지 못하는 표정과 혼란이 범벅되어 공존했다. 안산 시내를 오가는 버스 안에선 누구도 크게 웃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초연해질 수 없던 날들이었다. 2015년 4월, 1주기였던 목요일. 퇴근 후 나는 안산으로 곧장 달려갔지만 8시가 넘은 시각에 행사는 이미 끝나 있었다. 안산 중앙동 광장을 수놓던 노란 풍선이 먼 하늘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봤던 그 밤, 울렁대는 마음을 도저히 감당하기 힘들어 집까지 8km가 넘는 거리를 하염없이 느리게 걸어 귀가했다. 토요일이었던 2주기. 단원고를 거쳐 화랑유원지로 회귀하는 거리 행진에 참가했다. 업무 때문에 차마 행렬에 가담하지 못한 단원구 복지 회관 직원 분들이 밖으로 나와 우리의 행진을 응원해주셨다. 도화지 위에 매직으로 쓱쓱 쓴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함께하던 모습. 만감이 교차하던 그 미소가 너무 든든해서 행진하다 말고 후드득 울어버렸다. 화랑유원지를 거쳐 도착한 광화문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친구와 우비를 챙겨 입고 세종문화회관 돌계단 위에서 함께 연호했던 그 밤, 입김은 하얬고 신발은 다 젖은지 오래였다. 그런 물기 어린 순간에도 바닷속 아이들을 생각하면 쉽게 추워할 수 없었다. 


서울로의 출퇴근이 점점 힘겨워지면서 몇 번이고 안산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어쩐지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진상 규명이 되지 않은 세월호를 두고 이 도시를 떠나는 건 꼭 슬픔을 방치하는 일 같았다. 어쩌다 흘러 들어온 외지인인 내게도 이 큰 슬픔에 도의적 책임이 있었다. 봉인된 세월호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 전까진 나도 좀처럼 거기에 발목이 묶여 떠날 수가 없었다. 탄핵이 결의됐던 2017년 3월 10일. 마침내 멈춘 바퀴가 다시 굴러갈 여지가 생겼고 그제서야 서울로의 이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4월까지는 안산의 봄을 지키고 싶어서 이삿날은 5월 초로 잡았다. 올해 안산에는 유난히 벚꽃이 늦게 폈다. 3주기였던 일요일. 서울에선 끝물을 보이던 벚꽃이 안산에는 흐드러지게 피어 호수공원과 화랑유원지 일대가 하얗게 물들었다. 눈부시게 만개한 그 벚꽃들이 마치 돌아온 아이들 같아서 함께 행진하던 이와 내내 울음을 삼키며 걸었다. 아름다워서 슬프고, 슬퍼서 아름다웠던 봄이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면서도, 이사를 하고 반년이 지난 지금도 안산을 생각하면 벚꽃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함께 슬퍼하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마음 다해 노력하려고 애썼던 시간. 안산은 내게 잊지 못할 봄이다. 어제 세월호 미수습자분들의 합동추모식이 있었다. 돌아오지 못한 가족을 영원히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할 유가족 분들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나는 영원히 안산이란 도시와 그곳의 봄을 가슴에 묻고 살게 될 것 같다. 눈을 감으면 이 도시에서 배운 슬픔이 마음 한 곳에서 반짝거린다. 반짝일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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