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린 Sep 01. 2015

편지에 얽힌 4개의 이야기

오래된 편지처럼 묵혀뒀던 서랍 속 이야기


Episode #1


간직하려는 습성도 병이라면 병일테다. 기록벽에 수집벽까지. 삶의 어느 순간에 남겨진 흔적들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구석구석 처박힌 종이 조각들. 버리지 못하고 간직한 첫 번째 기록은 아마도 누군가로부터 받은 편지일 것이다. 고향 집엔 아홉 살 때부터 모은 편지들이 운동화 케이스로 몇 상자 가득 있다. 내가 속을 썩일 때마다 우리 엄마가 불살라버리겠다고 한 내 소중한 물건 중엔 늘 그 편지들이 들어있곤 했다.

편지를 쉽게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무소유에 도가 텄거나, 감정이 몹시 무딘 사람일 것이다. '버려야지!' 하며 마지막으로 읽어보다가도, 다시 접어서 상자 제일 밑바닥에 넣어두었던 경험도 여러 번이다. 물론 그 편지들을 버린다고 해서 내 과거와 추억이 소멸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편지와 함께 잠든 수신인과 발신인 사이의 많은 일화들을 언제라도 되살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가능성으로 인해 나는 오래도록 재워둘 수밖에 없다.

생일·크리스마스· 새해 때 마다 주고받던 카드며, 내밀한 고민을 담았던 장문의 편지와 교환일기. 개중에는 간간히 연애편지도 섞여 있을 것이다. "이따 3교시 끝나고 매점갈래?" "오케이!" 라고 써진 공책 한 귀퉁이의 조각도 함께. 종이가 삭고 누렇게 변한다 해도 버리지 못할 사소한 마음과 추억. 생각하니 무척이나 읽고 싶다.




Episode #2


중학교 때, 소년원에 있는 어떤 아이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 당시 유행하던 채팅사이트의 ‘10대방’에서 우연히 대화를 하게 됐고, 이야기가 꽤 즐거워져서 펜팔하잔 얘기까지 나왔다. 편지를 써주겠다길래 내 주소를 먼저 알려줬다. 그러고 그 아이의 주소를 물으니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다며, 자신이 있는 소년원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서너달의 짧은 펜팔 기간 동안 일고여덟통의 편지가 오고 갔다. 그 친구가 들려주는 소년원에서의 일상, 자신의 꿈 이야기, 그에 가끔 섞이는 후회어린 마음들을 읽으면서 어떤 친구일까 상상하곤 했다. 단정하게 흘려쓴 필체가 꽤나 어른스러웠던 걸로 기억한다. '넌 걔가 출소해서 너희 집 주소로 찾아오면 어떡하려고, 겁도 없이.' 친구들이 그런 핀잔들 줘도 처음에는 곧잘 흘려 넘겼는데, 세뇌가 됐었는지 덜컥 겁이 났나보다. 어느 순간 내가 답장을 하지 않게 되면서 펜팔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편지 역시 한동안 버리지 못했다. 그러나 청소 중에 우연히 편지를 발견한 엄마가 기겁하신 이후로 없애버렸다. 정말 가끔, 편지를 쓰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그 필체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친구, 어디선가 잘 지내고 있겠지.





Episode #3


카세트테이프 편지라고 들어봤나. 학창시절, 라디오에서 DJ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청취자가 특별한 편지를 보내왔다며 소개해준 게 있는데,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냈는지! 만든 이의 창의성에 샘이 나서, 나도 똑같이 만들어선 소중한 친구들에게 주곤 했었다.(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니까.) 공이 많이 드는 제작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초소형 십자드라이버로 카세트 테잎 앞부분 나사 5개를 푼다.

2. 뚜껑을 열고, 비닐 테잎을 가차없이 빼 버린다.

3. 버린 테잎과 같은 굵기로 종이 띠를 만든다.

4. 그 위에 깨알 같은 글씨로 편지를 쓴다.

5. 테잎이 감겨있던 자리에 똑같이 감는다.

6. 뚜껑을 덮어 나사를 다시 조이면 완성!

7. 손가락으로 감아가며 측면구멍으로 편지를 읽는다.


유난히 시간이 느리게 흐르던 중학생 시절. 방학이면 간혹 이런 소일거리에 꽂혀 열정을 불사르곤 했다. 받는 사람도 반드시 손가락 노동을 해야만 읽을 수 있는 이런 신기한 편지를 앞에 두고 어이없어 할 얼굴을 생각하면서.

이십대가 되곤 다신 그런 정성을 못 들일 것 같았는데, 요즘 새삼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 "아직도 이런 주책을 떠는 할일 없는 여자가 있다니!" 하며 신기해할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는 그 재미로.




Episode #4


연말에 보내는 연하장에 유독 공을 들이는데, 그건 순전히 내 자격지심 때문이다. 나는 평소 전화 연락 안하기로 유명하다. 가끔 생각나도 소식 한번 전하지 않았던 나의 무심함에 면죄부를 주길 바라며, 매년 어떻게 하면 특별한 연하장을 만들지 궁리하곤 했다.

2009년인가. 당시 작업했던 타이프 편지지는 내가 만든 연하장 중 가장 좋아하는 작품. 갖고 있던 clover 타자기로 한 장 한 장 마음을 담아 타이핑을 쳐서 만들었다. 당시 잉크리본을 못 사서 임시방편으로 깜장 스탬프에 리본을 꾹꾹 찍어바르는 기지를 발휘했었는데, 손가락에 새까만 잉크자국이 몇날 며칠을 갔다. 겹받침을 찍을 때마다 shift 누르는 순서를 까먹어서, 편지 서른 장 가운데 열 장은 어설픈 문장으로 발송되고 말았다.

그때 이후 2년은 연하장을 안썼다. 늘상 손은 게을렀지만 마음은 수십 번이고 보냈을 무형의 연하장. 다시금 타자기에 앉힐 수 있다면.




작가의 이전글 바람, 여름만의 바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