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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린 Aug 21. 2015

바람, 여름만의 바람

선풍기 바람과 초여름 바람에 대한 단상


여름마다 꺼내 쓰던 선풍기가 예전같지 않더니 결국 고장이 나버렸다. 증상은 이랬다. 코드를 꽂아둬도 전기를 못 받아먹었다. 강풍 버튼을 눌러도 미동도 없다가 뭔가 바람이 느껴져서 흠칫 돌아보면 힘 없이 미풍만도 못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쩌다 버튼 한 번에 시원하게 돌다가도 살갗에 닿는 느낌이 사라져서 보면 다시 멈춰있곤 했다. 그 때 내뱉은 작은 탄식과 아쉬움이란.


원래 한 번 누르면 돌아가는 게 정상인 선풍기가 갑자기 랜덤 기계가 되어버리고 나니 느끼는 게 좀 생겼다. 잘 작동할 땐 느끼지 못했던 고마움과 희락 같은 것. 인간인 이상 이 더위에 선풍기 바람 없이 견딜려면 짜증, 불만, 예민함, 신경질이 나야 정상일 텐데, 솔직히 고장 초기가 지나고 나니 그런 날선 감정에는 무덤덤해졌다. 적응을 하다보니 또 적응이 된 것이다.(적어도 '고장 난 선풍기'에 한해서는 그렇다.) 이 덥고 습한 여름이 이상하게 올해는 견딜만한 걸 넘어서 좋아져버린 것 같다. 실은 '불쾌하다'는 감정에 무던해진 것을 '좋아졌다'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기대 없이 잠든 간밤에 갑자기 팬이 돌면서 정체된 공기를 흐트러뜨리는 게 느껴지기라도 하면 고맙고 다행스러운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더 지속되지 못했다. 나의 탁월했던 적응력과 돈 새는 구멍을 막아 금전적 지출을 유보시키려던 의지는 결국 7월 4째주에 무너졌다.




장마철 습도와 열대야의 앙상블은 기대 이상이었다. 체감 습도치의 최고점을 찍었던 그 주는 좀 힘들었다. 젖은 헝겊처럼 뒹굴던 이틀을 보내고 마트로 달려가서 사온 새 선풍기를 트니, '아. 선풍기 바람이 이렇게 셌구나, 이렇게 시원했구나.' 싶다. 선풍기 없을 때도 잘 지내 놓곤 다시 선풍기를 틀기 시작하니 다시는 이것 없이 집에 못 있을 것 같다. 불편과 곤란에 익숙하던 몸은 이렇게 약간의 쾌적함에도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짧은 우기 속에서 또 하나 새삼스러웠던 건 '한여름의 카페는 얼마나 좋은 장소인가' 하는 거다. 음료 한 잔 값이면 시원하고 편한 곳에서 몇 시간이나 보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예전엔 읽는 것도, 끼적거리는 것도 카페에서 참 많이 했었다. 어느 정도의 소음이 방어막이 되어줘서 몰입도 잘 됐었다.(내 작은 방의 적막이 어떨 땐 못 견디게 싫었던 것도 있다.) 근데 요즘은, 책은 지하철에서 읽는 게 제일 잘 읽히고, 글은 내 방 책상에서 쓰는 게 제일 잘 써진다.(지금 방이 좀 더 개방적인 구조라서 그런 것도 있다.) 카페 갈 일이 확 줄어든 가운데 토요일을 맞아 카페로 피서를 갔다. 책 한 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모금 삼키고 나니 그게 그렇게 쾌적할 수가 없다. 온 세상을 다 적실듯 내리는 장대비도 시원한 카페에서 보는 그림은 참 산뜻하다. 내가 저 속을 헤집고 돌아다니지 않는 게 다행스러워지니 비를 보는 마음도 너그러워진다. 비 때리는 소리가 한 겹 걷혀서 들릴 때의 평화로움. 비가 내릴 만큼 내리고 나면 8월 한 달은 정말 뜨거울 거다.


비가 올 땐 맑은 날을 그리워하지만 연일 뙤양볕만 내리쬐면 비 오는 날을 그리워하겠지.(8월 중순인 지금이 딱 그렇다.) '한'이라는 접두사를 붙이는 건 여름과 겨울 뿐. 한여름, 한겨울이라고 하지 한봄, 한가을이란 말은 없다. 그만큼 한 계절 안에 절정과 소강이 분명해서 여름의 한가운데였던 지금(당시 7월 말)의 시점에서 한 달 전을 생각해보면 정말 까마득하게, 그런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초여름을 막 지난 때였고, 신록의 풍경, 초록이 갓 짙어진 이미지가 있었다.




6월 하순, '좀 더 여름'스러워지고 있음을 느낀 건 주말 낮의 산책길에서였다. 잘게 부서지는 6월의 햇빛. 싱그럽게 흔들리던 나뭇잎 소리와 횡단보도 앞에 서있던 사람들의 머리칼이 가볍게 쓸리던 풍경. 오후 2시였다. 잠시 한산해진 도로 위의 적막 속에서 때마침 그 장면이 내게 온 거다. 가벼운 바람이었다. 뭉근한 봄바람보다 더 경쾌하고 싱그러웠다. 모든 게 신기했을 아기 때, 태어나서 만난 것 중 가장 신기했던 건 아마도 바람이 아니었을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갑자기 뭔가 살에 닿고, 잎사귀가 흔들리고, 냄새도 실려오는 게 분명 아기 눈엔 엄청 신기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날은 여름이 '나 점점 여름스러워지는 중이야' 하며 뽐내던 그런 날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 속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사람들을 쓰다듬는 바람의 결을 생각하던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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