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린결말 Nov 03. 2022

2cm짜리 털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

살고 싶은 질문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여름에도 긴팔을 입었다. 외가 쪽 유전자를 물려받은 나의 팔에는 평균 길이 2cm짜리 가느다란 털이 소복했다. 여자아이 팔에 긴 털이라니. 아이들은 자주 원숭이라고 놀려댔다. “너는 덥지도 않아? 여름인데 왜 긴팔을 입어?” 라며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친구들 덕분에 ‘긴팔 입는 이상한 애로 보일 거라는 걱정’도 하나 더 추가되었다. 아빠는 징징거리는 내게, 20년 후에는 팔에 털이 있는 사람이 미인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걱정 말라고 얘기했지만 그런 세상은 오지 않았다. 털과 미인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겠는가.


교복을 입어야 하는 중학생 때부터는 여름에 반팔을 입었지만 누군가 나의 팔을 보고 징그럽다고 생각할까 봐 늘 긴장하며 생활했다. 새로운 친구를 만날 때는 항상 먼저 털밍아웃을 했야 했다. 이거 봐, 나는 팔에 이렇게 긴 털이 있어. 긴 대신 가느다랗고 보드라워. 만져볼래?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면도를 시작했다. 왜 진작에 이 방법을 생각해 내지 못했는지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팔에 난 털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을 때 삶의 족쇄 하나를 풀어낸 듯 가벼웠다.


하지만 털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나는 외부로 표현되는 나를 타인의 시선이라는 잣대로 재단하며 살았다. 스스로 직접 나에게 갖가지 족쇄를 채운 셈이다. 마르고 볼품없는 몸은 빈티 나 보여서, 작은 키는 어린애처럼 보여서 늘 불만이었다. 옷을 고를 때는 남자들이 싫어할 만한 스타일은 배제했다. 대학을 고를 때는 원하던 전공이 아니라 대학 간판을 보고 선택했다.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 하나하나는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가’라는 필터를 반드시 거쳐야 했다. 나는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뒤틀린 인간이 되었을까.




미드의 자아 발달이론에 따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다고 한다. 미드는 사람의 자아정체성은 사회생활을 통해 후천적으로 결정되며, 인간의 사회화 과정은 ‘일반화된 타자’를 내면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일반화된 타자’는 타인이 보는 나의 이미지를 말하는데, 여기에서의 타인은 특정 대상이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의식하는 것 자체를 말한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이나 기준을 가진 가상의 타인을 상상하는 것이다.


나만 타인의 시선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 건 아니었구나, 사회화 과정 속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구나 싶어 마음이 놓였다. 얄팍한 안도였다. 나는 금세 깨달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타자’ 자체가 아니라 ‘일반화된 타자’의 모습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일반화된 타자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자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습일 수 있다. 누군가의 타자는 사다리의 꼭대기에 오르는 게 지상 최대 과제인 모습일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모 나지 않게 두루뭉술 흘러가는 대로 사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타자가 있을 수 있다. 나의 일반화된 타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동안은 타인의 시선에 매달려 사는 자신을 자책했다.  시선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가져서는  되는  나는  하러 가지고 있나 스스로 책망했다. 하지만 이건 소멸시켜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혼자   없는, 타자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인간은 타자의 시선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다. ‘어떤 시선에 우위를  것인가, 어떻게 하면 타자의 시선에 압도되지 않고  자체의 시선과 균형을 이룰 것인가 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팔에 난 털을 면도로 없애고 반쪽짜리 자유로움을 얻었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아예 면도조차 하지 않는, 긴 털이 자란 팔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이고 다니는, 내 팔에 그런 털이 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 팔에 난 털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나 자체의 시선이 타자의 시선을 가뿐하게 쫓아낸 것이다. 그렇게 나를 둘러싼 크고 작은 다툼 속에서 내가 타자를 뛰어넘는 일들을 하나씩 늘려 가는 게 나 답게 산다는 것 아닐까. 다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작은 바람이라면, 주체로서의 내가 튼튼하기를, 더 자주 자유로워지기를.


나는 나로부터 자유롭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러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