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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수 May 30. 2019

시베리아 여행의 중간역 '이르쿠츠크'

[세계여행 Day 90]

 횡단열차를 타기 전 날 모스크바에서 어떤 형을 만났다. 형은 나와 반대로 이르쿠츠쿠에 하루 들렸다가 모스크바에 왔다고 했다.

 그 날 저녁 형과 시내를 돌아다니다 모스크바의 추위를 피해 들어간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내 다음 행선지인 이르쿠츠크의 날씨가 문득 궁금해졌고, 형한테 어떤지 물어봤다. 그는 '춥다'라는 형용사를 수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부사를 써가며 이르쿠츠크의 추위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심지어 욕도 안할거같은 사람이 욕까지 써가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추위를 다 설명하지 못하는게 억울하단다. 옆에서 그걸 듣고 있던 다른 친구는 오만상을 찌뿌렸다. 그런데 나는 그걸 듣고 설레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도 이게 왜 기대되고 신나는 일인지 정말 모르겠는데 그냥 웃음이 계속 나왔다.  

 생각해보니 인도를 여행할 때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나면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나오곤 했었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은 지나고 나서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추억거리로 남았다.


 그때부터였나? 내가 이렇게 힘든 상황을 앞두고도 신나하는 변태가 된 건.


 문제는 그런 일을 겪고 있을 때 그 순간만큼은 진짜 힘들다는 거다. 지나고 나면 뿌듯한 추억거리겠지만 막상 당장은 죽을 거 같다.


-


 모스크바에서 열차를 탄지 5일만에 이르쿠츠크역에 도착해서 육지를 밟고 바깥바람을 맞았다.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현재 기온을 보니 영하 17도. 이런 수치를 본 적이 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견딜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위를 너무 두려워했던 탓일까? 걱정했던 것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햇빛이 들 땐 나름 따뜻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숙소에 도착했더니 오늘 이르쿠츠크를 떠나는 프랑스 여행자가 한 명 있었다. 잠깐 동안 인사를 주고받다가 어쩌다 날씨 얘기가 나왔다.
 "날이 많이 따뜻해졌어. 딱 좋을 때 도착했네, 다행이야."
 "그래요?"
 "응. 이틀전까지만해도 영하 35도까지 내려갔었거든. 운 좋은 줄 알아야 돼."
 "어...?"


 ......앞으로의 날씨가 기대된다.



기차 안에선 창 밖 설경이 따뜻해보이지만, 막상 기차 밖으로 나가면 무서운 추위가 맞아주는 재미난 시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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