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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Feb 04. 2018

영화 <동주>

동주와 몽규, 그 경계선에서

때아닌 흑백영화다. 포스터마저 흑백. 사실 강하늘과 박정민이라는 캐스팅은 꽤 뜨거운 반응을 얻었지만 나는 잘 모르는 배우들이라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그래서 그냥저냥한 저예산영화인가,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엇다. 영화가 시작하고 나서 강하늘은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엔젤아이즈 초반에 아역으로 나왔던 배우였다. 

사실 내가 이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던건, 다름이 아니라 윤동주라는 그 이름 때문이었다. 꽤 많은 사람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거기서 윤동주의 시를 배운다. 나는 고등학교의 문학 교육이 썩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그것 때문에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다. 예컨대 작가의 생각을 고르시오라는 문제를, 그 글을 쓴 작가가 직접 풀었더니 다 틀리더라하는. 그렇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문학교육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런 문학 수업이 있었기에 나는 아마 평생 읽지 않았을지도 모를 시를 많이도 읽었다. 의외로 거기엔 좋은 시가 많았다. 대학에 와서도 시집은 읽지 않았지만, 아니 읽지 않았기에 고등학교 때 배운 시들은 평생의 재산이 됐다. 아마도 이런 '문학' 수업이 없었다면, 평생 읽지 않았을 시들이었다. 거기에서도 유난히 좋아했던 이름이 바로 윤동주였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에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마 윤동주, 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윤동주에 대해 아는게 별로 없었다. 윤동주의 모든 시를 빼놓지 않고 읽은 것도 아니었을게다. 그의 시를 좋아했지만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몰랐다. 그런 그의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윤동주라는 이름은 나의 감성적인 부분과 맞닿아있는 시인이었던 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름만으로 먹먹해지는, 그런 이름이었다. 

의외로 영화의 초반에는 주인공이 윤동주라는 느낌보다는 송몽규라는 느낌이 강하다. 윤동주라는 인물과 송몽규라는 인물은 닮은 듯 전혀 닮지 않았는데, 우리 주변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인물상은 윤동주에 가깝다. 영화 내내 윤동주는 나약한 문인(文人)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그의 사상은 영화 초반, 거의 순수문학가에 가깝다. 이런 그의 모습은 사회주의 사상에 문학을 이용하려 했던 송몽규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송몽규는 직접 행동하는 행동주의자, 사회주의자였으며 직접 의거에 참여하는, 우리가 교과서에서 보던 전형적인 '문학가이자 독립투사'였다. 

영화에서 둘의 첨예한 대립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이 극명하게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확인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송몽규에 공감하게 되는데, 어쩌면 그것이 우리들의 나약함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제강점기에 그랬고, 지금 사회에서도 그렇지만,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으려하는 사람들이, 실제 행동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같은 인물이 훨씬 많으면서도, 역설적이게도 그의 사상에는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반대로 송몽규의 행동에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그것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에서 친구이자 친척관계인 몽규와 동주의 관계는 균형이 맞지 않다. 동주에게 몽규는 일종의 롤모델, 이상향이자 열등감을 느끼는 대상이다. 영화 내내 몽규는 동주보다 앞서있다. 글을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몽규에게 동주가 보여주는 떨떠름한 표정은 이런 관계에 있어서 동주가 느끼는 불쾌감을 잘 보여주는데, 몽규는 어른스럽게 대처하며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영화 내내 몽규는 동주에게 옳지만 불쾌하고, 떨떠름하지만 부러운 인물으로 그려지며, 일본인 형사 말처럼 "그의 그림자"가 된다. 이런 둘은 몽규의 노력과 동주의 자기부정으로 어떻게든 관계가 유지되는 듯 하지만, 결국 몽규가 체포되기 직전, "같이 가자"는 말에 동주가 "오늘은 안돼"라고 답함으로써 극단적으로 비틀리게 된다. 일면 쿠미에 대한 애정의 표현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자신의 시'와 '몽규와의 우정' 중에 전자를 선택하는, 일종의 몽규에 대한 반발이었다. 이는 이 영화에서 쿠미가 흔히 말하는 '여성 주인공'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둘의 연애선을 전혀 강조하지 않는 영화 특유의 담담함 덕분에 더욱 강조된다.

영화는 동주가 일본인 형사에게 잡혀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과 몽규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종막에 이르러서는 '죄를 시인한다는' 내용의 종이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는데, 영화는 몽규와 동주의 대조된 선택을 교차편집하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몽규는 "내가 더 제대로 했었어야하는데"라며 종이의 모든 내용에 서명하지만, 동주는 "그렇지 않았다"라면서 그 종이를 모두 찢어발긴다. 몽규와 동주의 한마디 한마디, 선택 하나 하나를 교차하여 보여주는데, 그동안 취조실에서의 모습을 동주만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몽규의 모습을 동주의 말 사이 사이에 끼워넣음으로써 우리는 이 둘의 선택이 본질적으로 같은 종류의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즉, 마지막까지 다른 선택을 하는 둘이지만, 그 근간에는 똑같은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이 영화는 동주의 성장통을 그린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라는 자기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해도 자신보다 몽규는 한 발 앞서 있었다. 신춘문예, 교토제대 등 자신이 실패한 것에 몽규는 항상 성공했다. 취조실의 교차편집 장면은 이런 동주가 죽기 직전에야 자신의 성장통을 끝내고, 몽규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완성하며, 그와 동시에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몽규라는 그림자에서 벗어나 올곧게 서게 되는 모습을 극적으로 그려낸다. 초반의 관계(몽규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도,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그를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랐던 동주)는 몽규에 대한 반발심을 내비치는 성장통의 과정을 거쳐 그를 인정하고, 거기에서 비롯하여 자기 자신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몽규가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이까"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 때까지만 해도 동주는 왜 자신에게는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느냐, 자신을 왜 운동에 포함시켜 주지 않느냐고 묻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 말에 들어있는 몽규의 따뜻한 마음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당연히 흑백 스크린이다. 이런 흑백 스크린이 인터넷에서는 상당히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나는 개인적으로 흑백을 선택한 것이 이 영화의 뿌리이자, 이 영화를 완성시켰다고 생각한다. 흑백화면은 (컬러사진이 없었던)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데, 역설적이게도 이는 화면에서 색깔을 배제하고, "사실감"을 없앰으로서 "사실감이 없는 과거"라는 새로운 종류의 "사실감" 혹은 "현실성"을 창조해낸다.


색깔을 빼낸 담백한 스크린은,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거리두기'를 관객에게 종용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장치가 되어준다. 그리고 이 거리두기의 과정은 관객을 스크린에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로 끌고 들어간다. 이런 흑백화면 덕분에 윤동주의 시를 내레이션하는 장면도, 몽규가 잡혀가는 장면도, 동주가 죽는 장면도, 감정이 과하게 분출되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그 담담함은 감정의 완전한 배제는 아니다. 장면 자체는 아주 담담하지만, 흑백으로 그려진 화면은 오히려 관객 속에 그 감정을 박아넣는다. 관객에게 폭발적인 감정을 강요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적절히 절제됨으로써, 화면을 보면서 그 감정을 모두 소진해버리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관객의 마음 속에 깊이 남는다. 흑백영화가 아닌 동주는 상상조차 할 수 없고, 아마도 훨씬 뒤떨어진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 

영화는 오해할 소지가 참 많다. 흑백영화인데다 윤동주라는 이름. 수능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순수문학가들의 이름은 참 무겁다. 나조차도 영화를 참 보고 싶었는데, 나의 수준을 아득히 넘은 영화라 보는 내내 졸다 나오면 어떡하나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순수문학에 초점을 맞춘 영화도 아니고, 사실 예술영화라 부를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아니다. 표현하자면 예술영화의 탈을 쓴, 담백하게 아주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상업영화 정도일까. 이 영화를 설명하라면 예술, 문학, 순수, 이런 표현보다는 청춘, 청년, 성장같은게 훨씬 잘 어울린다. 




송몽규의 그림자 안에 섰던 동주가, 거기에서 벗어나 홀로 일어나는 성장통을 그린 '성장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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