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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민 Feb 26. 2018

영화 <리틀 포레스트>

아주 특별할 정도로 평범한 영화

브런치 무비패스를 발급받았다. 오랜만에 정기적으로 글 쓸 거리가 생겨서 좋고, 한창 영화가 다시 좋아진 판국에 새로운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어서 또 좋다. 이번 브런치 무비패스의 첫 작품은 김태리·류준열·진기주 주연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였다.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동명의 일본 소설과 그 작품을 영상화한 영화까지 있는 작품의 리메이크다. 


요즘 부쩍 그런데, 영화관을 찾으면서 영화에 대해서 미리 찾아보지 않고 가는 경우가 많다. 덕분에 아주 이상한 작품들도 종종 걸리긴 하지만, 의외로 선입견 없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좋게 표현하자면 입맛에 맞는 영화만 골라보는 게 아니라 다양하고 폭넓은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것이고, 안 좋게 말하자면 온갖 막장 영화에 대한 마지막 보호 수단을 포기한 셈이다. 물론, 시사회는 그 폭이 훨씬 크다. 당연히 골라주시는 작품을 받아보는 것이고, 그 시사회에 참여할지 안 할지는 내 자유이지만 최소한 내가 원하는 작품을 시사회로 보여주세요!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런 의미에서 첫 작품,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굉장히 좋은 작품이었다. 위와 같은 영화 습관을 가지게 되면 의외로 평작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정말로 지뢰작만 아니면 감사하게 보고 나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건 그 정도가 아니라 이런 작품을 시사회로 그냥 보고 나와도 되나 싶었을 정도였다. 제대로 개봉하면 내 돈 내고 꼭 상영관을 찾아야 하지, 하는 결심을 보는 내내 몇 번이고 했다.


일본 영화의 비범한 번안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놀랐던 부분 중 하나는, 이 영화가 일본 작품의 번안이라는 정체성을 가장 잘 소화한 작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대개 일본 영화뿐만 아니라 어떤 해외 영화를 리메이크하더라도 번안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결과 많은 번안작들은 오리지널 팬들에게조차 어필하지 못하고 처참한 성적표를 손에 쥐는 경우들이 많다. 어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에는 그 시대와 사회의 문화가 담길 수밖에 없는 것이라서, 이걸 깔끔하게 소화해내지 못하면 관객에게 엄청난 위화감을 조성한다. 


그러면서도 일단 번안이 되고 나면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 영화가 되는 거라서, 오리지널 팬들도 "저건 외국 작품이니까" 하고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던 문화적 코드를 이제 쉬이 보내주지 않는다. 결국 번안이란 그 작품은 작품대로, 원작의 문화는 문화대로, 한국의 문화는 또 한국의 문화대로 선명하게 이해한 이후에야 완벽한 작품이 나오는 것인데, 애석하게도 해외의 시나리오를 가져오면서 그 정도의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지 않다.


<리틀 포레스트>가 바로 그 어려운걸 또 해낸다.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감독이 큰 욕심을 내지 않았음이 느껴지는데, 즉 일본 색채를 씻어내고 그 자리를 한국 특유의 색채로 덮는 데에 강박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양이 대신 강아지를 넣는다거나 해서 관객의 위화감은 위화감대로 잘 씻어내면서도 일본 영화 특유의 담담함을 잃지 않는다. 일본 영화 특유의 담담하고 잔잔한 분위기가 한국적 정서와 이렇게까지 잘 맞을 수 있다니, 하고 감탄스러울 정도다.


일본 영화가 음식을 담아내는 특유의 기법 중 하나는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사물들을 움직이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지식도 짧고 정확히 뭐라고 부르는 기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의 수평 혹은 수직에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조리하는 모습을 담담히 찍어내는 것이다. 사실 조리하는 장면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 역동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인물을 정중앙에 배치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카메라의 화면 속에서 배우들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런 어색하고 인위적인 앵글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느낌을 낸다. "자연스럽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영화다.


영상에 뒤질세라 음향도 '열일'했다. 여기저기서 달그락 거리는 소리들이 하나같이 ASMR 뺨친다. 이 영화는 영상 하나, 소리 하나 버릴 게 없다. 가끔 책을 읽다 보면 이건 방 한편에 꽂아놓고 적당히 심란한 날, 적당히 우울한 날, 적당히 기분이 나쁜 날, 아무 페이지나 손 가는 대로 펼쳐서 한 서너 페이지 읽고 다시 꽂아두면 참 좋겠다, 싶은 작품들이 있는데, 이 영화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적당히 돌려보고 아무 데나 찍어보면 그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영화다.


일본 영화는 대개 사물을 집착적으로 '느낌 있게' 담아내는데 주력하는 작품들이 많다. 일본 영화뿐만 아니라 일본의 영상물들이 대체로 그런데, 예컨대 굉장히 좋아하는 드라마 시리즈 중 하나인 "심야식당"은 그 안에서 풀어내는 이야기도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한 편 한 편 풀어내는 음식들에 대한 표현이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사실 수많은 '있어 보이는' 표현과 감성적인 수사를 붙이기 전에 이 영화의 정체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표현 중 하나는 "최고급 먹방"이다. 영화의 흐름은 계절을 따라가고, 그 계절 속에서 혜원(김태리)은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그 농사에는 그 계절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이 자꾸 조리되고 만들어진다. 


아주 특별할 정도로 평범한 영화


이 영화의 주제를 꼽으라면 뭘까. 줄거리를 영상이 아닌 글로 접한다면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의 한 축은 "아픈 청춘들"이 될 것이다. 그도 그럴게 혜원은 서울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다가 지친 심신을 이끌고 고향으로 내려온 인물이고, 그 안에서 많은 고민을 거쳐 성숙을 경험하는 인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영관을 찾은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런 '청춘물'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으쌰 으쌰 해서 힘들었지, 우리 한 번 힘 내보자, 하는 선명한 메시지를 이 영화는 던지지 않는다. 즉, "평범한 삶의 소중함"이라는 평범하지 않은 메시지를 던지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평범하기에 너무나도 특별한 영화다.


그렇다. 역설적이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평범함이다. 이 영화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등장인물들의 얼굴만 제외하고 나면 그 어느 것도 특별한 부분이 없다. 어디선가 일어나고 있을 전원적인 삶의 전형이다. 사실 이런 전원적인 삶 자체가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아주 특별한 것이지만, 영화에서 그들의 특별함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아주 순수하게 지켜본다. 굉장한 것을 담아내려는 노력은 없다. 그런 노력 없이 굉장한 영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더욱 빛이 난다. 평범한 삶에 대한 긍정이라는, 조금 진부하기도 하고 거창하다면 또 거창하기도 한 주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영화는 많은 '클리셰'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으로부터 어떠한 긴장도 갈등도 도출해내지 않는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은 갈등이다,라고 학교 문학 시간에 그렇게나 배웠던 것 같은데, 그 전형적인 문학이론은 여기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삼각관계 비슷한 것이 될 것 같았던 세 친구의 관계는 그러나 어떠한 두드러진 갈등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두 친구의 관계는 전혀 멀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소위 말하는 "선의의 경쟁자"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안에서 어떤 커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청춘물답게 친구들의 끝장나는 우정을 과시하려고 시도하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솔직히 말해서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우리 중에 누군가 적당한 화질의 캠코더를 들고 일상을 촬영한 것 같은 영화다.


우리들의 '리틀 포레스트'


사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우리 모두 영화이 주인공이 아니듯, 우리의 삶은 평범하다. 그러나 평범한 우리의 삶은, 그게 우리의 삶이기 때문에 특별할 수밖에 없다. 그 어떤 특별한 삶보다도 소중한 것이 우리들의 평범한 삶이라 것. 이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나 끓어오르는 우정 대신 따뜻한 마음, 화사한 기억이 남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면서도 이 영화는 아주 조곤조곤 말을 건네 오는 것이다. 과연, 여러분에게도 리틀 포레스트는 있나요. 여러분에게도 뿌리내릴 곳은 있나요. 물론, 이 영화는 100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의 자세를 그대로 견지하면서 뿌리내려야 할 곳을 알려주지 않는다.


나에게 뿌리내린 곳은 어디였을까.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이 글을 3년 여를 떠나 있었던 고향에 오랜만에 내려와 쓰게 되었다. 3년밖에 안되는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태어나 1년 이상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곳이다. 그렇다면 이 곳이 내 '리틀 포레스트'일까. 의외로 답은 단순하다. 이제 이 곳에 내가 아는 친구도, 내가 아는 사람도 얼마 남아있지 않다. 내 마음의 고향, 이라고 그럴싸하게 이름 붙여줄 수 있지만 이 곳은 내가 뿌리내린 곳이 아니다. 숲은 아무 곳이나 적당히 뿌리내리고 자라나지 않는다. 숲은 내 옆에 다른 나무가 있기 때문에 '나무들'이 아닌 '숲'이 된다. 우리들 주변의 작은 숲, 그곳은 아마 우리가 주변 사람과 관계 맺고 있는 그곳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우리의 숲은 먼 곳에 있지 않다. 혹시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내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 그 안에 우리의 리틀 포레스트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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