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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린 Aug 23. 2021

매직은 하루키 같은 사람이나 가능하지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읽기

아침부터 바빴다. 바빠서 아침에 요가도 하지 않고 볼일을 처리했다. 그래서 한숨 돌릴 틈이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찾아왔고, 그제야 요가매트를 펴고 요가를 하고 책을 읽었다. 오후 3시라는 걸 깨닫자 '오늘은 그냥 넘길까'하는 유혹이 찾아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의지를 가다듬고 티비를 켜고 유튜브를 틀고 요가를 따라 했다. 

 요가를 마치고 나서 읽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시작한 지 며칠 안 된 거 같은데 벌써 100페이지를 넘겼다. 오늘 읽은 5회 차의 제목은 <자, 뭘 써야 할까?>였다. 상상력이 부족하고 스토리 짜는 일을 못하는 내가 참 궁금하던 파트였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하루키의 '뭘 써야 할까?'는, 평범한 듯하면서도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일단, 그는 어떤 일이든 결론을 내기보다는 그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며 소재를 머릿속에 쌓아간다고 한다.  그저 그때그때 사물의 세부사항을 그냥 아무 맥락 없이 뇌 내 캐비닛에 보관해 두고, 소설을 쓸 때는 그런 것들을 꺼내서 짜잔 하고 매직을 쓴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 ET를 언급하면서, ET가 창고 속의 우산이라든가 전기스탠드라든가 전축 등 잡동사니들을 모아 몇천 광년 떨어진 행성과 교신하는 통신기를 만들어 내듯이 '짜잔' 하고 소설을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그도 역시 '주위를 주의 깊게 둘러보면 소설 소재들이 보인다'라는 흔한 이야기를 이번 챕터에서 들려주었다. 헤밍웨이처럼 투우를 체험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소재가 많으니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 작법서를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꽤 많이 들어본 거 같은 느낌이 든다. 그만큼 흔한 이야기라는 거겠지. 하지만 그 흔한 이야기에 '짜잔 하고 매직을 쓴다'라는 부분이 더해졌을 때, '역시 하루키는 범상치 않은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만다. 대체 '매직을 쓴다'라는 게 뭐야? 아니, 애초에 ET가 창고 속 잡동사니로 외계행성과 연결하는 통신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건 그가 ET였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나. 그러니까, 아무리 무라카미 하루키와 비슷하게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라면 "짜잔!"하고 매직을 부릴 수 없을 거 같은데... 아니 애초에, 매직이라는 걸 아무나 부릴 수 있을 리 없잖아요 아저씨...


그가 '소재는 우리 주변에 있으니 평소에 잘 관찰하고 그것들을 잘 조합해서 나름대로의 멋진 작품을 만들어 봐라'라고 말하려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안다. 하지만,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않고 평범한 재료로 혼자 뚝딱뚝딱 만들었는데도 단번에 문학상을 수상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건 아마 하루키 같은 사람이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하루키는 ET급이라는 이야기다. 그 자신도 행운의 덕을 본 부분이 많았다고 이야기하는데, 애초에 하루키는 야구장에서 '소설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계시를 받은 그 시점부터 로또 당첨보다 더 좋은 행운을 얻은 행운아이므로 그가 말하는 '주위를 잘 관찰하세요'라는 조언은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ET가 다른 별에서 온 생명체이듯, 하루키도 나와 같이 사회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닌, 그냥... 하루키라는 존재인 것이다. 그래, 매일 10km씩 뛰는 것만으로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겠지.


어쨌든, 5회의 재미 었던 부분을 덧붙이며 오늘의 짧은 글쓰기를 마무리해 본다.


시인 폴 발레리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인터뷰했을 때, 그는 "착상을 기록하는 노트를 들고 다니십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온화하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란 표정을 보였습니다. 그러고는 "아, 그럴 필요가 없어요. 착상이 떠오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분명 그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지금 내 손에 노트가 있었다면'하고 아쉬워할 만한 착상은 이때까지 거의 없었습니다. 게다가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한번 머릿속에 들어가면 그리 쉽게는 잊히지 않는 법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24페이지-


사족: 아냐, 난 어제 돈가스를 구워 먹겠다고 마트에 가서 돈가스 소스만 사고 정작 돈가스를 사 오지 않았다고. 정말로 중요한 돈가스를 까먹고 말았는걸. 하루키 같은 행운아가 돈가스 소스만 허탈하게 손에 든 기분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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