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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천 Apr 16. 2018

인도와 철학자


나마스떼, 인디아입니다.


2005년, 2006년도에

인도여행을 하면서 인도에 대하여 관심이 많을 때였다.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나에게 한 지인이 물었다.

“인도에는 사상가나 철학자가 많은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으며 그저 얼버무리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인도 신문에

우리나라 신문과 다른 칼럼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명상, 정신성 또는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Spirituality’ 칼럼이다. 요즘 나는 이 ‘Spirituality’ 칼럼을 읽으면서 비로서 그 답을 더듬을 수 있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기원전 3,000년전에 인도는 고대 이집트, 아시리아 그리고 바빌로니아 문명과 함께 인더스강 주변의 도시국가 ‘하라파’와 ‘모헨조다르’에 이미 찬란한 고대 인더스문명이 있었다. 인도 원주민 ‘드라비다’인들은 청동기문명으로 살고 있었으나 철기문명으로 무장한 아리아인의 침략에 인더스문명은 속수무책으로 소멸되면서, 원주민 ‘드라비다’인들은 남인도로 쫓겨나야만 했다. 이 사건은 인도를 현재까지 지배하고 있는 베다(Veda)사상의 새로운시대가 열린 것을 의미한다.


점령군 아리아인들은

인도 원주민들을 세뇌시키고자 신(神)의 계시인 베다(Veda)사상을 들여오면서 ‘카스트계급’ 사회를 만들어 자신들은 지배자 그룹인 ‘브라흐마(사제)’와 크샤트리야(무사, 왕족)를 장악하고 원주민들은 바이샤(상인)과 수드라(노예)계급으로 만들고 그것도 모자라서 ‘불가촉민’ 계급제도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Veda 사상’은 피 지배자인 인도인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아버렸다.


예를 들어,

인도인의 삶은 네 단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학습기(브라흐마)로써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인도인들은 약30세까지 공부를 한다.

두 번째로는 가정생활(그리하스타) 기간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자녀들을 육성하는데 약 25년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나면 자신은 사회적 의무를 모두 마쳤으므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은둔기(바나프라스타)에 들어간다.


사람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10-20년간의 은둔기를 거쳐 깨달음을 얻게 되면 이를 설파하러 순례기(산야사)를 갖는다. 이것은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삶의 지표(과정)이라고 베다(Veda)는 가르친다.

그 중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가’는 ‘크리야 요가(Kriya Yogic)’로써 고대 인도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Veda이후 모든 철학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크리야 요가(Kriya Yogic)’는 기본 중에 기본으로 현재까지 인도인의 삶속에 살아있으며 익히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오늘 신문에 ‘크리야 요가(Kriya Yogic)에 대하여 다음과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영원한 에너지 (Boundless Energy)

자기 바스데부(Sadhguru Jaggi Vasudev, 1957.09.03월생, 현존하는인도의 저명한 요가, 시인, 사상가)는 ‘오자스(Ojas)’라고 하는 미립자 형태의 작은 에너지가 우리를 끝이 없는 세계(영원)로 이끌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를 정함에 따라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자기보존 본능을 타고 났습니다. 우리가 단순하게 육체적인 한계를 따라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자기보존 본능은 삶의 주요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육체적 본능으로써 생식(본능)일 것입니다. 이것 또한 자기보존 본능의 가장 기초적인 ‘종의 보존’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써 우리 몸이 자기 보존에 대한 감각(본능)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으로 접근>

그렇지만, 인간은 다른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나는 누구이며, 얼마나 훌륭한지, 현실적으로 무엇이 될 것 인지)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한계를 짖지 않으려는 무엇인가가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한계를 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영원함’ 그 자체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지만 문제는 우리 스스로 그것은 제한적으로 분할해서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분할하여 극복한다면 평생을 걸려서도 근본적인 해답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 둘, 셋, 넷을 세면서는 결코 ‘영원함’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끝없는 계산'일 뿐입니다. 올바른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는 그곳(영원)에 도달하지도 못하는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영원함에 도달하기 위한 항로를 명확하게 하는 것>

'경계의 끝' 즉, 영원함에 도달하기 위하여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단(이동체)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육체(몸)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격물로 정의하는 경계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영원함’에 도달하려면 비 물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비 물리적이면서도 특정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동체)을 창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자스(Ojas) ‘는 아주 미세한 에너지이며, 다른 차원의 비 물리적인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고유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수단(이동체)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다 실효적인 ‘오자스(Ojas) ‘를 만들 수만 있다면 현재의 삶 안에서도 이동(영원함)은 원활하게 될 것이며, 나의 삶(인생)이 나를 스스로 돕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우리를 따라 부드럽게 움직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주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겠지만 종국에는 우리의 삶은 부드럽게(매끄럽게) 지속되게 됩니다. 우리는 잘 다듬어진 ‘오자스(Ojas) ‘에 둘러 쌓여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초인’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오랜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는 깨어난 존재를 엔소(Enso)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하나의 둥그런 원을 말하며, 원은 완벽함으로 저항이 아주 적은 모형을 뜻합니다. 우리가 효율적인 ‘오자스(Ojas) ‘를 가지게 된다면 가장 적은 저항으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원을 가지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논하는 명상가(Meditator)는 ‘오자스(Ojas) ‘의 생산을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대부분의 영양분은 육체적 에너지로 변환됩니다. 그리고 극히 일부분만이‘오자스(Ojas) ‘가 됩니다. 우리가 내면의 에너지를 높이려는 요가(Yogic)와 같은 크리야(Kriya)를 하는것은 바로 이와 같은 비율을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물의 많은 부분을 ‘오자스(Ojas) ‘로 바꾸고자 하는 노력인 것입니다. 크리야 요가(kriya yogic)의 모든 과정은 음식물이 살이 되고 소비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음식물을 훨씬 더 많이 미묘한 형태의 ‘오자스(Ojas) ‘로 전환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아주 많은‘오자스(Ojas) ‘를 가지게 되면 하늘과 그 이외의 신성한 모든 것들과 소통이 자연스러워집니다. 그때에 우리가 가진 에너지가 너무도 미묘하여 모든 것들을 단순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감이 강해지고 약해지는 것처럼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옮길 수 있는 ‘오자스(Ojas) ‘의 규모와 강도와 질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역으로 ‘오자스(Ojas) ‘의 성장을 소멸시키는 방법으로는 부적절한 태도,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 그리고 다양한 유형의 잘못된 정신 활동에 있습니다. 특정한 유형의 운동, 과도한 성생활, 과식, 과다한 각성제 섭취 그리고 오염 된 환경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확장을 시킬 것인가?>

크리야 요가(Kriya Yogic)와 같은 정신적인 운동은 ‘오자스(Ojas) ‘를 담을 수 있는 커다란 탱크를 만드는 것으로 우리가 ‘오자스(Ojas) ‘를 만드는 것은 샘의 작은 구멍에서 물이 새어 나오듯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우리가 샘(탱크)에 더 많은 구멍을 뚫을 수만 있다면, 짧은 순간에 우리가 모을 수있는 에너지가 엄청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성(Spirituality)활동이란 ‘오자스(Ojas)를 활성화하여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즉, 완전히 다른 경험과 내면의 즐거움을 즐길 수 있으며,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명상(Meditation)은 오로지 나 자신만의 것은 아닙니다.


한 25 명 정도가 모여서 제대로 된 명상을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마을 전체가 평화롭게 될 것입니다. 마을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전반적인 안정감을 갖게 될 것은 분명합니다. 명상에 깊이 들어갈수록, 나 자신은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 될 것이며, 이것은 평화와 행복한 삶과 같이 단순하게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위가 올바른 에너지로 둘러 쌓여있을때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오자스(Ojas) ‘를 경험하고 그 안에 있을 때 비로서 진정으로 우리는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출처, The Time of India (2017.09.09) ‘Boundless Energy’ 중에서



다시 십년의 세월이 지나서

인도로 돌아와 인도를 공부하면서 ‘인도에 왜 그렇게 훌륭한 사상가와 철학자가 많이 나오는지’ 그 이유를 비로서 알 수 있었다’


나마스떼,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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