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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Jun 09. 2020

외로움, 고독감 그리고 소속감 (1)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심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상황적으로나 부웅- 떠 있는지 몇 년 째이다. 아니 애초에 어딘가 소속된 적이 있나 싶다. 뭘 바쁘게 엄청 열심히 하다가도 내가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모르는 건 매한가지. 아무도 모르네. 주변 사람들은 나에 대해 항상 혼란스러워하고 나도 나를 설명하는 게 약간은 혼란스럽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이제는 뭐 그려려니 하지만. 스스로 깨달을 지혜와 힘은 없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피드백 들으며 깨달은 게 대부분인 건 어떻게 된 건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대학교 때 치열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걷고 자전거타던 새벽시간 여의도-반포공원까지의 길. 그 시절 내 핸드폰 사진첩을 가득 채우던 여러가지 얼굴의 한강대교.

몇 년이 지나 다시 걸으니 느낌이 이상했다.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내가 다독여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 한번 더 깊게 생각해보기도 하고. “지금은 그때보다 괜찮아진걸까?”










괜찮아진 거면 뭐가 괜찮아진걸까. 대학교 때에는 내가 뭘 평생으로 해야하는지. 평생의 무엇을 가지기 위해선 어떤 기준이 있어야하는지 이런 모든 것들에 태클을 걸며 하나하나 따져보았다. 나에게 대학교는 부산 탈출과 하고 싶던 모든 것에 대한 공부를 하기 위한 곳인데 실상은 무척이나 달랐다. 술을 무진장 마실 수 있는 건 좋았지만 그럴 수록 이런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대학생이지만 나는 그러한 “대학생”이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았다.



한 곳에만 머무는 것이 두려워 이것저것 되게 많이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여러 개의 대외활동, 연애, 알바, 동아리, 여행 등등. 그러면 어디에서나 ‘뭔가를 여러 개 하는 아이’, ‘바쁜 아이’로 통해 있었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어딘가에 속해있지 않으면서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 그러면서 혼자만의 시간은 충분히 확보하는. 역설적이게도 이 때에 가장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가장 불안해했으며 항상 소속될 곳을 찾아나섰다. 당시 속해 있는 곳과 사람들은 부정하면서. 소위 말하는 더 좋은 대학교. 더 바쁜 아이. 더 열심히 사는 아이. 이런 타이틀만이 내 앞에 놓여져있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밀어넣었다.



그럴수록 더 외로워져갔다. 그때는 고독하지 않았다. 그냥 무작정 외로웠고 혼란스러웠다. 반수, 재수, 유학, 워홀, 취업 등등 모든 걸 다 건드려봤다. 이거한다고 했다가 저거한다고 했다가. 인생의 첫 번째 외로움은 결국 해외생활 도전으로 결론을 내렸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 나를 밀어넣는 게 필요했고 어릴 때부터 막연히 꿈꾸던 걸 해보자고. 그래서 잘 살아남을 수 있는지, 지금 모든 게 해외나가는 것으로 결론이 나오는 데 그럼 어디 한번 잘 해내는지 보자고. 잘 다니지도 않고 방황하던 학교 생활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날로 먹으려는 마음도 아예 없던 건 아니고.



힘든지도 모르고 번 돈으로 살기에 제일 비싸다는 곳 중 한 곳에 갔다. 한인 커뮤니티가 잘 되어 있어 나름 적응하기 편했던 곳이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선 가지마라고 하지만 나는 언어가 주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첫 해외살이가 그 곳이 아니었음 이렇게 잘 지내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흔히들 말하길 해외생활은 고독하다. 가족들과 같이 지내도 고독한데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고, 말이 통해도 문화가 통하지 않아 말귀가 통하지 않는 곳은 오죽할까. 마냥 즐기지 못하고 지금 뭐하고 있는 지에 대한 고민을 더 격렬하게 했다. 돈은 돈대로 쓰고 시간은 시간대로 버리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이제는 이러한 생각이 스트레스로 바뀌어 내 스스로가 내 몸을 공격한다. 머리는 압력에 터질 것 같고 손과 눈은 시도 때도 없이 떨리고 잠에 들지 못하며 겨우 든 잠에도 악몽에 소리 지르며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살기 위해 글을 썼듯 살기 위해 걸었다. 편히 쓰던 일기가 더이상 소통될 수 없다는 걸 안 이후에는 글 쓰는게 무서워졌기 때문에. 하루에 네 시간씩 걸었다. 그럼 적어도 잠은 잘 잤으니까. 딱딱한 땅에 무릎이 아파와도 계속 걸었다. 깊이 자리 잡았던 사람을 떼어냈고 소속된 곳은 없었고 외로운 것은 아니고 고독스러웠다. 중고등학생 때 철저한 고독 속에서 홀로 청소기 돌리고 빨래 했던 시간들과 같이. 이런 생각이 들면 크게 심호흡을 파- 내시고 계속 걷는다.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없애거나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 걸으면 죽을 것 같아서. 한여름이라 좀 선선해진 일몰시간에 맞춰 걸으며 예쁜 걸 보고, 너무 어두워져 위험해지면 그래도 살고 싶어 겁을 내며 뛰어가는 내 모습을 보곤 ‘죽고 싶진 않나보네.’하며 어떠한 힘을 얻어가고의 반복이었다.









외로움에서 기인된 두 번째 고독은 걷는 것으로 약간 마무리 지어놨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찾아 깊게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어 좋게 마무리 된 것 같다. 직업을 찾은 것 같긴 한데 왜인지 소속감은 여전히 들지 않는다. 소속감 불감증인가. 아니면 이제는 소속감이 필요없게 된 걸까. 외로움에서 고독감으로 바뀌었을 땐 내 깊은 곳의 어떤 나무가 뿌리째 뽑혀 그 아래의 가지들을 만천하에 내보이며 발라당 누워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당장 인형뽑기처럼 무엇에 의해 옮겨져 브라질에 있든 이탈리아에 있든 북극에 있든 뉴스에 나올 일은 아니니까. 북하안..이라면 좀 가능할 것 같지만.



그래서 내 삶의 모든 방향성은 단단해졌다. 핸드폰이나 돈 하나없이 브라질이든 이탈리아든 어디에 인형뽑기 당해서 떨어져도 온전히 집으로 찾아 올 수 있게 능력을 키우는 것. 그냥 찾아오는 게 아니라 이동네저동네 다 짱 먹고 단군아저씨 아버지가 처음 내려올때처럼 뒤에 수많은 사람들을 등에 엎고 오는 것. 이제는 더 외롭지 않다. 소속감도 필요하지 않다. 내 마음과 몸이 편하기 위해 당장 불편한 것들을 가릴 수 있게 덮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치웠다. 그러니 고독한 건 당연하고.










나의 의지가 아닌 이유로 잠시 한국에 머물며 재정비를 하고 있지만 나의 의지가 아니라며 모든 걸 놔버리고 불평하고 싶지도 않다. 지금의 고독함은 이제껏 겪어온 것과는 다른 분위기의 고독함이 시작되었다. 어딘가에 속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외로움이 너무 큰 건지 고독을 이겨낼 힘이 없는 건지 외로움이 크게 느껴진다. 단순히 소속감의 유무만이 외로움과 고독을 결정 짓는 것은 아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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