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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Oct 12. 2021

그런 걸로 상처 받지 않는 나이


재택근무를 마친 시간은 칼스럽게 17시 30분.


일부러 노트북은 끄지 않고 나가기로 했다. 바로 메신저 로그아웃을 해버리면 일 열심히 안 하고 있는 게 발각될 것만 같아서. 그래도 “자리비움” 상태가 되는 건 막을 수 없지만, 10분의 시한부 농땡이 정도는 왠지 허용될 것 같아서 그랬다. 가끔 메신저라는 건 나의 상사에게 성실히 고자질하는 또 직원처럼 느껴진다. 언젠가는 복수할 수 있을까?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나는 마지막으로 마우스를 한번 더 살짝 흔들어주었다. 딱 지금부터 10분이라는 점을 메신저에게 한번 더 상기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대단한 여정은 아니긴 했다. 그저 집 앞 도서관에 가려고 나왔을 뿐이다. 마음이 조급해지진 않았다. 횡단보도를 건너려 하는데 어떤 강아지와 같이 신호를 기다리게 되어 좋았다. 나를 경계했지만 그 모습이 귀여웠다. 책을 빌려 돌아오는 발걸음 역시 가벼웠다.


- 빌리기 힘들었던 도서가 마침 있었고 (무라카미 T)

- 다 읽지 못했던 반납도서도 예약자가 없어서 다시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캐니 밸리)

- 새롭게 발견한 좋은 책도 있었고 (끝까지 쓰는 용기)

- 무엇보다도 이 책들이 다 새 책이었다 (도서관에서는 드문 일이죠?)


뜻밖의 행운들로 버무려진 마음을 안고 횡단보도를 다시 건넜다. 큰 소나무가 놓인 아파트 입구를 지났다. 그리고 우리 집 통로인 3-4라인 게이트로 들어가려는데 어린 오누이가 보였다. 누나로 보이는 아이는 많아봤자 다섯 살, 남동생은 세 살 정도. 그들을 위해 마련되었을 발판을 딛고 집 호수와 비밀번호로 누르고 있는 듯했다. 잘 안되는지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했다. 나는 방해하지 않으려고 걸음속도를 늦추며 지켜보다가 같이 들어갔다.


둘만 다니기엔 좀 어린것이 아닐까도 싶었다. 오지랖이다. 그냥 똘똘한 아이들이겠거니 싶었다. 내가 같이 들어가니 긴장을 하는 듯해 보였다. 잘못한 것 없이 미안해지려 하는데 오누이 중 누나의 기지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혼잣말) 엄마는 왜 안 오지?”


거짓 상황극을 설정한 것이다. 그들을 안심시켜보기 위해 마스크 너머로 눈인사를 건네었다. 나름의 최선이었지만 소용없는 듯했다. 오누이는 내 주변을 벗어나 게이트 입구 쪽으로 다시 왔다 갔다 하면서 두리번거렸다. 불러 놓았던 엘리베이터는 1층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 입장에선) 더 지체하게 되면 꼼짝없이 나와 한 공간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초조함이 살갗으로 느껴졌지만,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괜히 말이라도 더 꺼내었다가 상황을 악화시킬까 겁이 났다.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불안한 3인의 공기가 적적해질 무렵. 누나가 다시 아이디어를 냈다.


“(혼잣말) 계단으로 올라가야지!”

그러면서 갑자기 계단 쪽으로 혼자 후다다닥. 홀로 남겨진 남자애는

“누나 같이 가ㅜㅜ”


홀로 남겨진 나는 ‘띵’하는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를 갑작스러운 쓸쓸함과 함께 맞이했다. 멍-했다.


긴장이 풀리면서 ‘허허’라는 아저씨 웃음이 절로 나왔다. ‘하하’도 아닌 ‘허허’

이렇게 허탈할 정도로 귀여울 수가 있나? 그리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보고도 이렇게 웃음이 나올 수 있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이런 걸로는 상처 받지 않는 나이가 된 걸까.


타인이 나를 싫어해도 괜찮다.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더군다나 내가 따스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대라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게 상처 받지 않는다. 존재만으로 감사하기 때문이다.


부디 이 마음이 한시적이 아님을 빈다. 오늘이 재택근무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길 바란다. 이렇게 글감을 떠올릴 수 있는 날(살만한 날)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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