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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Sep 07. 2021

프렌치 김치 국물 리얼리티 다이어리

2021년 9월 7일 화요일


‘어? 이거 지워진 줄 알았는데’


 반바지에 묻어있는 김치 국물이 이제야 눈에 띄었다. 입고 나오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당연하다. 요새의 나란 인간은 외출할 때 신경 써서 옷을 고르지 않기 때문이다. 추울까 더울까, 판단이 끝나면 그때 즈음에 가장 편하게 입는 의류를 또 또 착용할 뿐이다. 내 옷이 일백 벌이라 치면, 그중 스무 벌이나 입으려나. 쇼핑하고픈 욕망도 자연스레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누가(보통 아저씨가) 입은 기능성이 좋아 보이는 소재의 옷에 눈길이 간다. 막 오오 이런 소리도 내면서 말이다. 가끔 나도 그런 내 자신을 보며 헛웃음을 지을 때가 있다. 패셔니..라고 칭하긴 민망하지만, 조금은 신경 써서 옷을 입었었던 나는 어디 갔을까. 어디가 긴 어디가. 그냥 이게 요즘의 나다. 아저씨.

후, 아무리 그래도 김치 국물은 좀 심했다.


 오늘은 모처럼 휴가여서 큰 맘먹고 연희동을 나온 날이다. 혼자 맛있는 것도 먹어보고, 카페에 가서 힙이란 것도 떨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김치 국물이라니! 그 빨간 자욱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들었다. 아차 싶어서 입고 나온 차림새를 확인했다. 베이지색 반바지(고무줄인 건 윗옷을 넣어 입지 않기에 가려지지만 김치 국물 혼재), 뉴발란스 슬리퍼(비가 왔으니 발의 습도 관리 차원에서 당연하다), 검은색 브랜드 티셔츠(멋져 보이려고), 검은색 얇은 나일론 롱 재킷(비가 살살 내리는 편이니 뒤집어쓰고 다니려고, 그게 약간 자유로운 느낌이라고 생각, 약간 영국 감성이랄까). 제각기 이유가 있지만 굳이 총점을 매기자면 수우미양가 중 양 정도라고나 할까. ‘나 카페 들어가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으로 번져 버렸다.


 조금 걷다 보니 힘들었다. 그 덕에 내 의복에 대한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뭐 어때!’ 라는 아저씨의 가불기 마인드로 무력화시킨 것이다. 비슷한 예로는, 길거리에서 방귀가 마려워도, 술집에서 조금 큰 소리로 얘기해도 스스로 괜찮아져 버리는 걸 들 수 있다. 그런 마음을 확인이나 하 듯이 철이 한참 지난 가요(샵의 스위티)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갑자기 마트가 보이길래 휙 몸을 틀어 들어갔다. 집의 전구가 깜빡거리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봉투나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는 55 와트짜리 기다란 형광등을 손에 들고 나오며 생각했다. ‘예전 같았으면, 챙피하니까 카페 다녀온 다음에 사러 갔겠지?’ 불필요한 내숭이 없어지면서 품위도 사라졌고, 이상에 괴로워하지 않는 대신 너무 현실적이 된 건 아닐까.


 중간에 생활용품샵도 있는 바람에 결국 발 베개까지 사들고 카페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내가 좋아하는 빵들을 몇 개 골랐다. 저녁밥으로 먹기로 했다.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같이 봐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결혼하기 전엔 절대 먹어보지도 않았었던 무화과 깜빠뉴와 초코 프레첼(방금 영수증을 보고 적음)을 공금 카드로 구매한 다음에, 내 용돈카드로 아메리카노를 한 잔 주문했다. 빵 포장과, 발 베개와, 형광등을 옆에 두고 비 오는 창가에 앉았다. 옆 테이블에선 대학생 남녀가 채용 자소서를 쓰고 있었다. 화내다가 웃다가 열심이었다. 그들이 부디 취업도 잘하고, 사회의 쓴 맛도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대화를 엿들었다. 이상한 안도감이 든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널찍한 공간의 빈티지 프렌치 베이커리 카페에선 유럽풍 인디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내 반바지의 김치 국물은 조도가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 네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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