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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현 Dec 02. 2023

쌀쌀한 날씨와 시큰한 마음, 그리고 언어들

<만추>, <헤어질 결심>, <드라이브 마이 카> 

겨울이 왔다. 체감상 올해 겨울은 조금 늦게, 하지만 아주 재빠르게 찾아온 것 같다. 급격한 추위와 함께.


그리고 이런 날씨에 생각나는 사랑이 있다. 늦게, 하지만 언제 스며들었는지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날카롭게 파고드는, 그런 사랑. 그리고 그런 마음이 있다. 언젠가부터 깊숙이 잠겨 있는 시큰한 흔적과 같은 마음. 무엇으로부터 치유해야 할지 또는 무엇으로 치유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시큰한 마음과 쌀쌀한 날씨가 감도는 영화를 골랐다.



만추


말 그대로 가을이라면 생각나는 대표적인 로맨스 영화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고른 것을 혹자는 따분한 선택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당연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 영화가 만추라는 제목이 붙은 이유도, 여러모로 ‘만추’를 떼어 놓고는 말할 수 없는 서사여서 일 것이다.


© <만추> 2011 김태용


훈과 애나는 우연히 만난다. 각자의 서사는 공유되지 않는다. 짐작할 뿐이다. “왜 다른 사람 포크를 써요?” 애나가 꾹꾹 눌러 담던 자기의 이야기를 표출한 건 무엇도 아닌 포크 때문이었다.  자고로 인간이란 가장 할 말이 많은 것에 가장 침묵하며 어떤 날에는 고작 포크가 내 감정의 충분한 이유가 되는 법이다.


이처럼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훈과 애나도 서로에게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서로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어떻게 살고자 하는지 묻지 않고 알아내려 하지 않는다. 당신과 나의 지금 여기의 현존, 그것 외에 여타 것들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속절없이 찾아오는 사랑을, 변해가는 도시와 흘러가는 시간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설명의 요구도 생략된다.


과거 이야기가 오가긴 한다. 그러나 발화한다고 해서 말들이 오롯이 전해지는 건 아니다. 훈과 애나는 다른 언어를 쓰고, 그 소통의 틈새에서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서로를 향한 감정일 따름이다.


 “It’s been a long time.” 가을의 끝자락에서, 훈과 애나는 서로를 기다린다. 영화가 남기는 여운은 기다림의 시간이 마치 관객에게로 옮겨진 듯한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가을은 느릿하게, 하지만 선명하게 겨울이 된다.




헤어질 결심


어쩌다 보니 탕웨이 주연작 리스트업이 되어 버린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놓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러한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뜻이기도 할 터다.


© <헤어질 결심> 2022 박찬욱


영화는 눈에 보이는 것과 흐릿한 것, 포착되는 것과 포착되지 않는 것,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배치하는 데 힘을 들이고 있다. 안개, 이포(작중 배경), 언어, 죽음, 진실, 심지어 사랑마저도 마음의 고백도 헤어질 결심도 그렇게 그려낸다.


서래는 말한다. "당신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요." 해준은 해결되어야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사건도 잊고 파일도 지우고 사진도 지우려면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걸 해결하고 넘어가는 게 그가 품위를 지키는 법이다. 그러나 예외. 그게 서래다. 어쩐지 알 수 없는 서래 남편의 죽음에 담긴 전말처럼, 끝까지 찾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종결내지 못한 서래다. 이들의 언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매개체를 통해 전해진다. 번역기, 문자메시지, 조사실, 음성 파일, 어느 하나 직접적인 것이 없다. 당신의 말이 내가 생각한 그 말이 맞을까, 당신의 행동은 내가 의심하는 그게 맞을까. 맺어지지 않은 채로 종결되지 않은 채로 직언되지 않은 채로 명확한 공간을 떠도는 어슴푸레한 감정들.


"사랑한다"라는 말 한 마디 없이 말해지는 사랑. 그걸 관전하는 우리의 계속된 편견과 모호함에 대한 아우성을 뿌리치듯 내뱉어지는 "마침내 ". 그리고 138층의 산에서 밀물의 모래 밑으로 파묻혀 버린 결심. 마침내 영원토록 사랑하기 위한 헤어질 결심. 해준은 종결된 많은 것 가운데 서래만큼은 잊지 못할 것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사랑’ 자체를 말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영화를 납작하게 보는 셈이 될테니. 영화에서 사랑은 다만 소재로 쓰였다. 그 소재를 갖고, 영화는 관계 속에서 마주하는 마음들에 대한, 결국 그것들을 향한 나의 마음에 대한 신중한 전언을 던진다.


© <드라이브 마이 카> 2021 하마구치 류스케


줌파 라히리 소설 <축복받은 집>은 아이를 잃은 부부의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날들을 그려낸다. 아무렇지 않게 넘기려 애쓰는 것들이 얼마나 자잘한 상흔을 남기는지, 그 자잘한 상흔들이 얼마나 깊은 골을 만들어 내는지 섬세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영화를 보며 생각났던 소설이다.


“결국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 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이해하고 싶다면 먼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볼 수 밖에 없습니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말한다. 상대의 마음은 결코 알 수 없을 거라고, 다만 들여다 봐야 할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마음이라고. 가후쿠는 아내에게 아내의 외도를 묻지 못한다. 아내의 ‘할 말’도 듣지 못한다. 아내는 죽었고 가후쿠에겐 죄책감이 남았다. 가후쿠가 아내의 말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아내의 대답이 두려워서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 대답을 들었을 때 자신의 마음을 두려워하는 셈이다.


영화는 영화 속에 삽입된 여러 이야기와 여러 인물을 통해 듣고 들리는 상황을 연출한다. 이야기들은 중첩되고 교차되고 관객에게 물음표를 던지고 상기시키도록 이끈다. 전혀 다른 말 같지만 마치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데, 영화에서 가후쿠가 연출하는 연극 <바냐 아저씨> 역시 서로 다른 언어로 연기하는 다중 언어극으로 연기자들은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하나의 극을 이끈다.


우리의 감정들은 다르다. 그렇지만 비로소 소통되는 것들은 있다. 전해지는 감정이 반드시 전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과 같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같을 수 없으며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들여다 볼 수 밖에, 나의 것을 그리하여 타인의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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