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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나나 May 18. 2022

4년 전, 프리랜서가 되기로 선택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 진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았을 때는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15살 즈음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디자인과가 있는 실업계고를 진학하면서 디자이너 인생이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된 디자인 외길(?) 인생 (아주 잠깐 중간에 비행 시기도 있었지만)은 디자인과 학생으로 시작해 직장인, 프리랜서를 거쳐 이제는 디자인으로 사업을 해야 할까 하는 결정의 기로까지 다다랐다.



“프리랜서를 하는 이유는 뭔가요?”

여러 업체의 대표님이나 담당자를 만났을 때 은근히 많이 묻는 질문이다. 아마도 이건 “회사가 싫어서요”라는 대답을 하는 사람을 거르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려 한다.


처음 프리랜서가 되려고 했던 때는 27살이었다. 1년가량 프리랜서로 일했었지만 말이 프리랜서지 그때 당시 신분은 그냥 영화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생활비라도 벌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영화관 알바가 메인 잡(main jop)이 되면서 이대로는 발전이 없을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디자인에 신물이 난 나는 돌연 “검색 키워드 마케팅”회사에 취직을 하게 된다. 내가 영업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면접을 보러 갔다가 전화영업을 해야 한다길래 일단 해보기로 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기만의 일을 시작한 여느 사람들처럼, 나는 내 윗 상사들의 위태로운 모습을 보며 “회사가 나를 책임져 주지 않는구나”라는걸 피부가 시리게 느꼈다. 매출이 잘 나오지 않아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움을 만들어 냈고, 10년 차 상사들도 나와 똑같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갔더랬다. 그래서 2019년 3월, 나는 다시 프리랜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나 스스로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나름 경력직 프리랜서라고, 이전의 경험을 더듬어가며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한두 가지는 정하고 시작했다. 그때 당시 이 하나는 정말 하지 말자라고 생각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르바이트다. 생활비 명목으로 영화관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것에 안주하던 과거의 나를 기억하며, 사람이 쪼들려야 뭐라도 한다! 하는 생각에 무조건 디자인 일만 받았다. 예외로 영업 회사를 그만두면 타이밍 좋게 간단한 콘텐츠를 만드는 프리랜서 에디터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 업무는 내가 해보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다.

누군가 그랬더랬다. To do list가 아닌 Not to do list를 만들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본능적으로 No to do를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아무 준비 없이 회사를 때려치운 이유는 나에게 있는 ‘디자인’이라는 기술력으로 어디 가서 밥은 굶고 살지는 않겠구나 라는 근자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정확하리만치 빗나간다. 처음에는 (당연히) 일이 없었다. 재능마켓에 서비스를 올려보기도 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프리랜서를 구하는 곳에 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연락 오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인맥도 없었다. 재능마켓에서 간간히 카드 뉴스 디자인 정도만 의뢰가 들어왔고, 에디터 일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며 살아갔다.



고대하던 첫 달 수입은 3만 원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달은 30만 원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우스갯소리로 한 달 만에 수입이 10배나 늘었다고 말했지만, 쓰린 속은 별수 없었다. 그렇게 약 1년 정도는 월 수입이 100만 원을 웃돌았다.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신세라 집세나 각종 세금들을 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혼자 살았다면 영락없이 거지꼴을 못 면했을 거다.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슬럼프에 빠지게 되었다. 대게 열심히 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그 시기가 쥐뿔도 안 하는 나에게 찾아왔다. 슬럼프를 따라 무기력증이란 놈도 함께 따라왔다. 이 두 놈은 굉장히 친한 사이인 것 같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주구장창 웹툰만 봤다. 없는 살림에 캐쉬도 질렀다. 노숙자 아저씨들이 없는 살림에 소주는 사 먹는 심정이 이해가 됐다.


“저 사람은 잘하고 싶은 자신과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자신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중이야.”

누군가 당시의 나처럼   없이 누워있는 사람들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내가 들었으면  좋았을 말이었을 텐데, 아무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시간으로 버텨냈다. 나는 이대로 회사로 돌아갈  없었기에 허접한 포트폴리오를 어디든 들이밀었고, 엄청난 퀄리티가 필요하지 않은 일들을 하나둘씩 시작하게 되었다. , 물론 아주 헐값에 말이다. 1,2년가량은 재능마켓도 꾸준히 하고 이따금 인스타에도 올려보고, 포트폴리오를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만들면서 계속해서 일을 구했다. 물론 지금도 여러 루트를 통해 나를 알리려고 방법을 연구하고 있지만 더이상 재능마켓은 하지 않는다. 재능마켓 자체는 좋은 플랫폼이지만, 재능마켓을 사용하는 고객들의 인식은 너무 하향 평준하 되어있고 그저 가격으로만 경쟁하는 구도로 형성이 되어있어서 “라는 브랜드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있는 플랫폼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큼 지금도 여전히 쉽지 않고 앞으로도 쉽지 않을 거다. 가끔은 복지 좋은 회사에 취직하고 싶은 충동도 든다. 하지만 “쉬운 일은 없더라”는 어느 방송인의 말처럼, 어딜 가든 뭘 하든 쉽지 않다. 이제는 쉬운 일을 하고 있으면 의심이 들 정도다.


프리랜서는 인맥이 없으면 힘들지 않나요?

맞다. 힘들다. 하지만 인맥이 있는들, 고객을 유지하는 건 본인의 몫이다. 하지만 난 인맥 없이 프리랜서를 시작했고 지금도 여전히 프리랜서로 살고 있다. 힘들어서, 어려워서 못할 것 같다며 직장에 다니는 건 본인의 선택이고 그것 또한 또 하나의 자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프리랜서를 한다고 하면 마냥 부러워만 한다. 어디서 이상한 유튜브를 보고 와서는 “여유롭게”일하면서 돈 벌어서 부럽다고 떠들어댄다. 본인은 법인카드로 커피를 사 먹으면서 말이다.


프리랜서던 직장인이던 그것은 본인의 선택이다.

언제나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고 어떤 선택이든 뒤에 따라오는 책임은 결코 쉽지 않다.


나는 나 스스로를 책임지기 위해 프리랜서가 되었고, 온 힘을 다해 그 책임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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