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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Dec 14. 2023

퇴준생의 편도 경조사비

퇴직 준비생의 직장 동료 경조사비 혼란기

내 경조사비는 편도다. 


나는 퇴사를 목적으로 입사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직을 위한 입사였다. 첫 커리어를 SCM팀에서 시작한 나는 생산 현장을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같은 SCM직무라도, 공장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몸값은 분명하게 차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것을 커리어 초반에 갖추고 싶었다. 그래서 두 번째 회사는 생산 기획이란 직무로 입사했다. 내 근무지는 공장이었고, 내가 가장 많이 협업하는 곳은 생산 현장이었다. 소망했던 대로 공장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직무와 환경이었다.  


공장 위치는 충청도에 위치한 시골 바닥이었지만 괜찮았다. 만약 정년까지 다녀야 한다면 위치는 중요하겠지만 나는 "퇴준생"이다. 직무 경험만 쏙 빼먹고 다시 돌아가려는 내게 근무지는 무관했다. 

 그 괜찮다는 게 꼭 위치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 회사는 산업 내에서 평균적으로 대졸 사원 초봉이 아쉬운 편이다. 비슷한 매출 규모의 기업들보다 적게는 10%, 많게는 30%까지도 차이 난다. 그렇지만 괜찮다. 입사 당시에 나는 그 연봉이 훗날 내 연봉에 대단한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워렌버핏이 투자를 시작했을 때 상승장이었을지, 하락장이었을지가 현시점에선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마치 커리어를 길게 늘어트려 놓으면 첫 번째 회사의 연봉보단 거기서 쌓는 직무 경험이 더 중요했다. 


위치, 연봉 외에도 많은 지표들이 "괜찮"았다. 괜찮다는 게, 좋다와 동의어는 아니다. 그보단 "알빠 아님"에 가까운 괜찮음이다. 어차피 거쳐갈 회사니까. 그런 자잘한 의사결정이 (물론 연봉은 자잘한 건 아니지만) 우선하지 않았다.


그런데 모든 게 괜찮던 퇴준생에게 조금은 부담스러운 문제가 생겼다. 그건 동료들 경조사비다.

부의금, 축의금은 역사 깊은 사회적 약속이다. 여기엔 "돌려받음"이 전제돼 있다. 노골적이진 않지만 우리는 더치 경조비를 기대한다. 내가 성의를 표한 액수만큼 돌려받아야 계속해서 이 약속이 순환된다. 직장 동료에게 오만 원을 보냈다면, 나도 고스란히 오만 원이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그보다 적으면 서운하고, 넘치면 그 또한 난감하다. 


그런데 퇴사를 준비하는 상태에서 경조사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매번 어렵다. 리턴이 담보되지 않는다. 돌아오지 못할 경조사비다.


입사 초에는 큰 문제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적은 금액도 조금씩 조금씩 누적되면서 잔고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불편했다. 매번 줄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싫었다. 어디까지 줘야 하고, 어디까지는 주기 애매한데, 정확한 선이 없었다. 내 그릇이 간장 종지만큼 작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혹은 월급이 간장 종지만해서. 하지만 얼마를 번들 마음 가지 않은 사람에게 쓰는 돈은 아까운 걸 우째.


지속되면 나만 스트레스 받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1년이 지난 지금엔 나름의 규칙을 만들었다.


경사 ) 같은 사무실 / 자주 일하는 동료는 축의금을 챙긴다.

경사 ) 적당한 거리의 동료는 축하 인사만 전한다.

조사 ) 적당히 거리가 있는 동료들의 부의금을 챙긴다.

조사 ) 당연히, 같은 사무실 / 자주 일하는 사람들의 부의금을 챙긴다.


기준은 이렇다. 경사는 계획할 수 있는 일이고, 조사는 계획할 수 없는 일. 이 회사에 재직 중에 경사가 있을 확률은 아직은 적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내가 충분히 시기를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축의는 보수적으로 낼 수 있다. 

 다만 조사는 내가 계획할 수 없는 일이다. 재난처럼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상상하기 싫지만 언젠가 그런 날에, 내가 부의금을 전하지 않은 동료가 부의금을 전한다면 민망하기 그지없을 거다. 그러니 아무리 퇴사를 생각하고 있더라도 조사는 챙기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나는 부디 그 부의금이 편도이길 바란다. 아주 오랫동안 영영.


만약 나처럼 퇴사나 이직을 준비 중인데 직장 동료의 경조사비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이 되는 분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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