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획과 영감 Feb 24. 2022

1박 2일 PD 체험기, 작은 성공의 가치

[뮤직비디오 PD가 된 과정 3] 이센스 '그 xx 아들같이' MV

※본 글은 2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3. 작은 성공의 가치



촬영 현장의 일용직, 다시 말해 현장연출부로서의 고된 첫 경험을 마친 나는(↓), 이후 두 달여간 (원래 진행하던) 영화 촬영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여름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프로젝트가 모두 마무리되면서 다시 백수가 된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위해 구직사이트를 종횡했다. 그러던 중 폰 스크린에 어색하면서 반가운 연락처가 떴다.


더보이즈 조감독님 김 xx (2편에서 소개된 MV 현장 조감독)



"잘 지내니ㅋㅋㅋㅋ요즘 뭐하니"

"영화 끝나서 쉬고 있습니다ㅎㅎ"

"잘 됐다. 급하게 촬영이 잡혔는데 PD님이랑 제작부장님이 사정이 생겨서 일을 그만두셨어. 근데 내가 지금 병원에 입원했거든. 그래서 팀에 사람이 없어! 감독님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같이 해보는 거 어때"


이전까지 나는 Key스태프로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독립영화 현장에만 있었기에, 좋은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아직 능력치가 부족한 게 아닐까 망설였다. 조감독님이 '그렇게 어려운 촬영 아니고, 지난번 (현장 연출 부였던) 현장만큼만 해주면 충분해!'라며 안심시켜주신 덕에, 간신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뮤직비디오 감독님을 다시 뵙게 되었고, 당장 이틀 뒤에 있을 촬영에서 '제작 PD'라는 직책을 맡게 되었다. 사실, 반나절 정도면 끝나는 간단한 셋업의 촬영인지라 그렇게 거창한 이름을 붙일 것도 없었으나 열심히 해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주셨다고 생각한다.


해야 하는 업무는 다음과 같았다.


-섭외 (엑스트라 관리)

-회계 (인건비 지급, 세금계산서 처리)

-현장진행 (촬영 소품·비품 조달, 식사 진행)


그렇게 미팅을 마치지 마자 설렐 틈도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다.




<1> 촬영까지 D-1



준비기간은 단 하루! 아직 준비 안 된 것은 무엇 무엇?

 콘셉트에 부합하는 장소, 외국인 출연진 12명, 소품용 간판... 등.


당황스럽게도 가장 중요한 것들이 모두 안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우선, MV 콘셉트를 정리해 보자.

「스탠드 업 코미디 (위트 있는 풍자를 하듯, 아티스트가 가사를 뱉는다)」


그렇다면 꼭 준비해야 하는 항목은?


- 소무대가 딸린 재즈바...

- 반짝이는 LED 네온 간판,

- 술과 함께 공연을 즐기는 다양한 외모의 외국인들


우선, 장소(소무대가 딸린 재즈바)는 이번 촬영을 진행해주시기로 한 조감독님께서 담당하기로 했다. 그럼 나는 나머지 두 이슈만 해결하면 된다.


1. 간판:

돈을 더 얹어 주더라도 반나절 안에 제작-발송까지 해주는 업체를 찾으면 됨. 쉽게 해결 가능!


2. 외국인 모델들(12명가량) :

촬영 18시간 정도밖에 안 남았는데 어디서...!?!




니나 다를까 사람을 찾는 것이 문제였다.


촬영 직전에 1~2명의 섭외가 필요한 일은 종종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10여 명이 넘는 인물들, 그것도 서울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하루 전에 섭외하는 것은... 허허허 (이렇게 긴박하게 진행된 건 아마 최종 콘셉트 확정이 늦어졌던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무작위로 아무나 섭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속사를 통해 전문 배우를 섭외하는 것 또한 일정상 너무 늦었고, 예산상으로도 불가능했다.


내가 가진 유일한 옵션은 배우가 아닌 일반인을 섭외하는 것인데 영상 작업은 스크린에 얼굴이 그대로 노출되는 작업인지라, 촬영 경험이 없는 일반인을 섭외했을 때 생길만한 문제를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특히 해당 뮤비는 아티스트가 오랜만에 컴백하면서 공개하는 앨범 수록곡의 MV이자, 그가 공개하는 최초의 MV였기에 사전에 논의된 콘셉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스탠드 업 코미디'인데 공연을 보는 인물이 10명도 채 안된다면 화면이 심심해지고 느낌이 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렇기에 이 미션을 꼭 성공해야 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섭외 조건을 구체적으로 정리해보았다.



<외국인 모델 섭외 기준>


-현재 서울에 있고 (촬영 장소:이태원→ 교통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에 거주하면 좋겠군)

-내일 당장 촬영장에 나올 수 있고 (지각/펑크 내지 않을 만큼 충분하면서도, 과하지 않은(제작비 고려) 인건비 비 책정이 필요하겠네)

-MV 콘셉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지닌 (시에, 힙합 or 아티스트 or 촬영 자체에 관심 있는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러워야)

-여성/남성/Bald/파마머리/20대/30대 등 다양한 외모,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 (약간의 acting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극적이어야)


그다음, 주변 인력 풀에 최대한 도움을 요청했다. (촬영을 할 땐 어쩔 수 없이 사람이 뻔뻔해진다. 일 때문에 연락해도 너그러이 여겨주는 지인분들에게 고맙다) 3년 전 다녔던 언어교환 카페 매니저님.... 부전공 같이 듣던 미얀마 출신 한국 유학생....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담당자... 국제학과 전공하는 지인들... 전 남자 친구까지...... 급하면 못할 게 없다.


하지만 이렇게 여기저기 연락을 해도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12명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친구들이랑 내일 당장 밥약 잡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일하러 오라고 하면 누가 쉽게 오겠나)


어찌저찌 연락이 닿은 외국인분//의 외국인 친구//가 속한 외국인 유학생 단톡방//에 속한 멤버의 친구 or 친구의 친구까지 샅샅이 집착하면서 수색망을 넓혔고, 관심을 보이는 몇몇에게 이 작업에 매력을 느끼도록 설득, 또 설득하면서 전 인원을 섭외했다.


우린 따로 사전 미팅을 할 수 없었기에, 프로젝트 진행 전반에 대한 설명(의상, 페이, 시간, 장소, 액션 등)을 명확하게 해 줄 필요가 있었다. 더불어 촬영에 1초라도 늦으면 안 된다는 협박도 자행해야 했다.


이제 남은 건 '촬영 경험이 전무한 그들과 어떻게 순조로운 진행을 만들어 갈 수 있을지'다.




<2> 촬영 D-day



나의 협박이 간곡했는지 대부분의 모델들이 약속 1시간 전까지 속속 도착했다.


이때부터 정말 긴장이 되었다. 외국인 출연진들의 쏟아지는 질문과... 나의 영어 울렁증, 그리고 처음 보는 기술 스태프 분들의 차디 찬 눈초리. 심장이 콩콩콩 날아다녔다.


원하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통역가 역할이 되었다. 비록 엉망진창 수준이었으나, 현장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나와 매니지먼트 쪽 사람뿐이었기에... 그렇다고 아티스트 관계자에게 부탁을 할 순 없지 않나. 촬영 내내 감독님의 디렉션을 통역해주어야 했고, 긴장한 출연자들이 뻣뻣해지지 않도록 분위기도 띄워야 했다. 그러면서 나의 영어 실력은 아티스트 및 모든 스태프 앞에서 그대로 발가벗겨졌다. 하하.


나는 발표 공포증을 타고난 사람인데, 현장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로 주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무조건 해야 됐다. 내 공포증보다 촬영 딜레이가 안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ㅋㅋㅋ 발음에 뻐터 한 사발 묻히고 뻔뻔하게 했다.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큰 문제없이 모든 컷 촬영이 끝났고, 아티스트 팬들도 만족하는 좋은 결과물이 나왔다.


사실, 이 이틀간의 경험은 실제 PD의 업무 중 10~20% 정도만 '체험'해본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돌아보면 이 짧고 굵은 현장을 경험했기 때문에 1달 뒤에 정식으로 MV 프로듀서 오퍼를 받았을 때 도망가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감독님, 조감독님 모두 외국인 모델 섭외에 대해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플랜 B를 고려하고 계시기도 했다. 콘텐츠 제작에 있어 섭외는 결과물과 직결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팀원분들께 좋은 피드백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작은 성공 경험일지도 모르지만, 작품을 만드는 일에 있어 내 몫을 해냈다는 것은 정말 벅찬 일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덕션의 다음 프로젝트(레드벨벳 '음파음파') 연출팀으로 일하게 되었고, 그 이후가 본 시리즈의 도착점인 'MV 프로듀서'로의 초고속 승진이다. 다음 4편에서는 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모든 과정이 우연과 위기로 점철되어 있는 이야기다.


> 뮤직비디오 보러 가기

이센스- '그 새끼 아들같이' MV (두 번 봐요 봐)





현장 비하인드. 젊은 날의 나



이 시리즈 [뮤직비디오 PD가 된 과정]을 연재하는 소기의 목적은 '어떤 분야에 있어서도 뭐 하나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지금의 나', 그리고 무슨 연유에 있어서든 (나와 같이) 오랫동안 스러져있는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라는 데에 있다. 지나간 짧은 도전적 경험들 속에서, 오늘날의 긴 방황을 끝내줄 아이디어를 찾아가 보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이 세상 모든 '와이어' 촬영에 존경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