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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하게 Nov 30. 2023

시작은 무계획, 60일의 발리

환전도 안하고, 숙소도 안잡고, 3일 전 결정한 여행

| 저 완전 P인데요


MBTI검사를 하면 INFP가 나온다. 이런 검사 하나로 나의 성향을 다 설명하고 싶지는 않지만, 즉흥성을 뜻하는 P 하나는 기막히게 잘 맞아 떨어진다. 지극히 계획적인 J 성향의 친언니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봤을 때, P는 계획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계획이 없어도 스트레스를 안 받는 사람들인 것 같애.

맞다, 맞다. 계획이 없을때도 물론 많지만, 그래도 걱정이 좀 덜한 편이다. 기질 상으로는 예기불안이 높은데, 또 이렇게 즉흥적인 걸 즐기는 성향이다 보니, 아주 뒤죽박죽이다. 


이번 여행도 매우 즉흥적이었다. 여행을 가기로 정한 건 고작 3일 전의 일이다. 따지고 보니 나는, 한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백수였단 말이다. 안 그래도 미세먼지도 거슬리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고민의 무게에 압도되어 압사 일보직전인 상태에 날씨 좋은 동남아는 아주 좋은 나의 도피처(?)였다. 저렴한 물가는 덤이다. 요즘 인플레이션이 극심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이 자명한 사실인데, 동남아는 일단 싸다! 똑같이 숨만 쉬고 똥만 싸더라도, 한국에 남아있는 것보다 돈이 덜 든다는 말이다. 그렇게 여행을 결심했다.


원래 계획은, '갔다가, 좀 아니다 싶으면 바로 오지 뭐. 일주일 있을 수도 있고, 이주일만 있을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갔다. 그게 머물다 보니까 한 달을 꽉 채우게 되고, 한 달 있다보니까 '가만있자, 이거 좀 더 있어도 문제 없겠는데?'라는 마음에 그게 두 달이 된거다.


안 그래도 확실했지만, 여기서 내가 P라는 걸 매우 매우 확신하게 된다. 좋은 숙소 찾았다, 해서 숙박을 연장하려 치면 성수기라서 그런지 바로 만실이 됐다. 덕분에 떠돌이처럼 이 숙소 저 숙소 즉흥적으로 예약해가며 유랑민처럼 지냈지만, 덕분에 발리 곳곳을 알게 되어 좋았다. 얼떨결에 발리 부동산 탐방을 한 기분이다. 비자 여건만 됐다면 그대로 6개월을 눌러앉았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발리에 가서 만난 많은 외국인 친구들은, 발리에서 오래 머물기 위해 비즈니스 비자를 받거나 (요가나 살사 등을 가르친다는 명목이다) 잠깐 근처의 동남아로 나갔다가 바로 다시 들어오는 식으로 발리에서 길게 체류하고 있었다. 나도, 중간에 비자 연장 비용이 대행사 껴서 총 8만원 가량 드는지라 좀 고민했지만, 이 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오래 있어보겠나 하는 심정으로 덜컥 연장을 해버렸더랜다. 자, 이게 바로 P의 여행이다.


이런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좋은 기회가 나타나면 고민 없이 잡을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여행 중 만난 여러 동행들의 제안을 즉석에서 받아들여 새로운 친구를 사귀거나, 몰랐던 지역을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새로 사귄 친구의 제안으로 난생 처음 살사를 배워보기도 했고, 생각지도 않았던 섬으로 일주일 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계획이 치밀하게 오밀조밀 짜여있다면, 이렇게까지 열린 경험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단점은... 성향에 따라 불안할 수 있다는 거?




| 기내용 캐리어와 3일치의 숙박


완전히 무계획이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일주일은 숙박을 잡아놨었다(?). 잠잘 곳은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다만, 가장 저렴한 1.1만원짜리 호스텔로 잡았다. (Ubud Tropical 이라는 호스텔이었다.) 그마저도 머무는 중간에 도저히 불편해서 3일만에 뛰쳐나왔다. (데스크에 말했더니, 군말없이 무료로 취소해주었다.)


출처 : (좌)호텔스닷컴 (우)부킹닷컴



사진으로는 정말 좋아보이지 않는가! 하지만 내가 체크아웃 한 후 정확히 2일 후 폭우가 쏟아져, 호스텔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다고 하지만, 너무 저렴한 숙소는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다.


내가 첫 숙소로 호스텔을 잡았던 이유는, 당연히 저렴하기 때문이고, 혼자 여행객이니까 친구를 사귀기 위함이었다. 호스텔만큼 자연스럽게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 좋은 장소도 없다. 물론 이후에 요가원에 꾸준히 다니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게 되었지만, 첫 스타트를 끊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나는 달랑 기내용 캐리어와 배낭 하나 매고 발리로 향했다. 워낙 미니멀하게 여행다니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이동이 많을 때 짐은 항상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발리에서는 그랩(Grab), 고젝(Gojek)과 같이 오토바이 택시를 타서 이동하는 게 빠르고 저렴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뒷좌석에 캐리어를 안고 타서, 비용도 많이 절감했더랜다. (일반 차량 택시는 가격이 오토바이의 2배 이상이다.) 물론 위험해보였지만, 나는 '운동으로 키운 코어 근육 이런데다 써먹는거지'라며 당당하게 그러고 다녔다.


여행이 끝나갈 때 즈음에는 캐리어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지만, 오히려 수납공간이 제한돼 있어서 쇼핑억제 효과(?)가 있었다. 이동비용도 아마 최소 15만원 정도는 아끼지 않았을까 싶다. 헤헿


아, 환전을 안해간 건, 트래블 월렛(Travel Wallet) 카드 덕분이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간단히 설명을 하자면, 외화를 미리 환전해서 체크카드처럼 결제하고, 인출도 할 수 있는 카드다. 발리에서는 CIMB랑 BNI 은행의 ATM 기기에서 출금하면 수수료가 나오지 않는다. (다만 500K 이상이었나 (5만원 정도) 출금하면 수수료가 2% 정도 떼였다.)


동남아 화폐들은 단위도 크고, 남으면 다시 역환전도 힘들어서 곤란한데, 트래블월렛 쓰면 돈이 남을 일도 없다.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환전해서 썼다. 트래블월렛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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