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주제인 거 아는데 한 번 얘기해보고 싶었어
그냥 브래들리의 삶이라는 뗏목을 타고 표류하는 게 훨씬 더 쉬웠죠.
2020년 HBO에서 만든 <러브라이프>라는 미드가 있다. 배우 애나 켄드릭(Anna Kendrick)이 주연한 다비(Darby)라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그녀의 16살 적 첫사랑부터 그녀에게 딱 맞는 짝을 찾기까지의 과정과 이별을 그린 드라마이다.
고작 10개의 에피소드, 각각 30분 남짓한 짧은 길이의 드라마인데 관계와 사랑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중 한 에피소드에서 다비는 한참 연상이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한 남자와 만나 연애를 시작한다. 한창 커리어도 관계도 불안정한 다비의 입장에서 그의 안정감은 '그의 삶을 타고 표류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감정은 드라마 속 그녀만 느꼈던 것일까? 대학생 시절 동아리 남자 선배 중 하나가 항상 농담처럼 여자 후배들에게 던지던 말이 있다. "그냥 취집 해~" 여러 방면에서 후배를 잘 챙겨주고 위해주던 선배였지만, 솔직히 그 말이 어찌나 듣기 싫던지. 심지어 선배는 내 전 남자 친구와 친구인 사이였는데, 사귈 때부터 "걔네 집에 돈 많은데 잘 붙잡아"라던지, 헤어지고 나서는 "걔 이번에 여자친구 생겼더라"하면서 내가 묻지도 않은 그의 따끈따끈한 새 소식으로 나를 슬슬 건드리고는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내 여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하고 싶다'라는 남자가 '내 남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하고 싶다'는 여자보다는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사실일 테니. 저런 말이 선배의 입에서 나오게 된 것도 결국 사회문화적 맥락이겠지. 이 말을 했던 그 선배 역시 자기 와이프를 40살 때는 은퇴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선배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열심히 투자도 하고 부업도 하면서 살고 계시기도 하고.
한 회계사 선배도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결혼하면 내 와이프 일 안 하게 만들 거야." 그래서 내가 물었다. "와이프가 일하고 싶어 하면요?"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일하고 싶으면 일하는 거지. 근데 나는 선택지를 주고 싶다는 거야. 일 하기 싫다고 일 안 할 수 있는 선택지." 흠. 솔직히 여자라면 한 번쯤 혹할만한 매력적인 말이었다. 저 말이 어떻게 듣기 싫을 수가 있겠어.
로스쿨을 다니고 있는 똑 부러지는 똑순이 룸메가 있다. 외모도 너무 예쁘고, 머리도 좋고, 여러모로 매력적인 친구다. 하지만 첫 학기 시작하자마자 학업 스트레스에 이리저리 치이는 중이다. 때로는 너무 부담이 큰 나머지 울기도 한다. 각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밤늦게 돌아와서 종종 소파에 앉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한다. 스파클링 워터 한 잔 기울이며 그녀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그냥 결혼해서 가정 주부 되고 싶다. 학교에서 사업하는 돈 많은 남자 만나서 일 안 하고 집에 있고 싶어."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가끔 이 말이 정말 진담으로 들릴 때가 있다. 그만큼 만나고 싶은 남성상이 굉장히 확실한 친구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서 일하던 때, 한창 남자 동기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하던 말이 있다. '내 꿈은 셔터맨이다.' 혹시 셔터맨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드리자면, 능력 있는 아내가 운영하는 가게의 문을 열고 닫아주는 무직의 남편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부인을 내조하는 남편'이랄까. 남자든 여자든, 삶이 버거우니까 부모가 아이에게 그러듯이 내 몸뚱이 하나를 부양(?)해줄 배우자를 찾고 싶은 마음을 투영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알랭 드 보통 작가의 사랑 3부작 중 하나인 <Kiss and Tell>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여주인공 이사벨은 사랑과 연애, 결혼과 관계에 대해 담담하고 솔직하게 말을 하는데 그중 한 장면이다.
있잖아, 보통 나는 상황을 통제하고 책임을 지고 싶어 해. 하지만 나한테는 안정되고 견실한 남자의 발치에 나 자신을 내던지고 싶은 면도 있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응석받이가 되도록 나를 돌봐줄 사람을 원하기도 한단 말이야.
...
나도 이게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니란 건 알지만,
어떤 수준에서는 돈, 먹을 것, 살 곳을 알아서 처리해 주는 사람이 필요해.
멋지고 독립된 성인으로서 모든 일의 주도권을 가지고 책임을 지면서 매일매일 성장해나가고 싶은 마음이 강하지만, 동시에 어리광 부리고 싶은 마음, 하염없이 이쁨 받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도 공존한다는 걸 이렇게 설명한다.
사실, 실제로 그런 케이스를 주변에서 많이 보기도 봤다. 한창 취직 고민이 많던 학부 4학년 언저리, 그래도 어린 축에 속하던 나는 나보다 두세 살 많은 언니들과 취준 관련 고민을 나누고는 했다. 면접을 보고 있던 시기에 언니들로부터 하나 둘 들려온 소식들은, 결혼을 하고 구직 활동을 그만뒀거나, 주재원 남편을 따라 이민을 갔거나 하는 경우들. 그리고 또 되게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았다. 그녀들의 개인사는 내가 절대 알지 못하겠지만, 추운 새벽에 차가운 자취방에서 눈 비비며 꾸역꾸역 화장실 불을 켜고 출근 준비를 할 때면, 결혼하고서 회사에 다니지 않아도 되는 언니들의 삶이 좋아 보이기도 하고, 그랬던 게 사실이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라면서요. 저는 이게 좋아요. 결혼한 주부로서의 삶이 제가 원하던 삶이에요. 선생님은 선생님의 잣대로만 저희를 바라보시잖아요.
영화 <모나리자 스마일>에 나오는 조앤이라는 인물은 하버드 로스쿨을 합격할 정도로 총명하고 능력 있는 여학생이지만, 로스쿨 진학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그런 그녀의 선택을 바꾸려고 애쓰는 교수님을 향해 조앤이 하는 말이 바로 위의 대사이다.
과연 그녀의 선택이 '남자라는 뗏목을 타고 표류하고 싶어' 선택한 결과로 보일까? 그렇지는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선택의 주체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하고,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 따라 판단할 것. 그냥 그런 메시지로 들린다.
결혼이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당연하다. 결국 언젠가는 빵 터져버릴 폭탄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이 든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지도 느낄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