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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쥬스 Jul 16. 2020

[소설] 티셔츠는 말이 없다

그는 한 달에 열 장의 티셔츠를 만들고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가 왜 티셔츠를 만들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예술, 영감, 창작 같은 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역삼1동 우체국 공무원이었다. 한번 출근하면 좀처럼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과 능숙한 손놀림으로 다음 번호를, 또 다음 번호를 상대했다. 점심은 늘 혼자 먹었다. 점심시간이면 하마 캐릭터가 그려진 노란색 도시락통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의 옆자리에서 이 년째 근무하던 김슬기 씨는 그가 도시락통을 챙기기 전 작은 수첩과 펜을 주머니에 넣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며칠 뒤 김슬기 씨는 점심시간에 그의 뒤를 밟았다. 그는 테헤란로의 빌딩숲을 벗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어 주택가 사이의 놀이터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열었다. 한여름이었다. 그는 나무 그늘에 반쯤 걸친 채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며 밥을 먹었다. 멍하니 앉아 우물우물 밥을 씹다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수첩에 적었다. 그리고는 다시 가만히 앉아 우물우물, 그러기를 반복하며 도시락을 비웠다. 김슬기 씨는 우체국으로 되돌아가며 그날 본 것을 혼자 간직하기로 했다.      


그의 티셔츠를 대표하는 요소는 문장이다. 티셔츠 앞면에 손글씨로 적힌 한 줄의 문장이 프린팅 되어있다. 매달 새로운 문장이 적힌 티셔츠가 발매되며, 한 달에 하나의 문장으로 열 장의 티셔츠만 제작된다. 그가 티셔츠를 통해 무엇을 전달하려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문장들은 선명하게 주장하거나 정치적인 함의를 담지 않는다. 삶의 비의를 드러내거나 막연한 위로를 건네지도 않는다.     


가령 2020년 8월 발매된 티셔츠의 선언은 이렇다.

빈 속에 물을 마시면 물이 살아있는 것 같다.     


2021년 4월 발매된 티셔츠의 선언은 이렇다.

잘못 걸린 전화에서 누가 울었다.     

 

2022년 12월 발매되 티셔츠의 선언은 이렇다.

쓰다 만 엽서를 마저 썼다.      


2019년 12월 최초로 발매된 티셔츠의 선언은 이렇다.

처음으로 티셔츠를 만들었다.      


그것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실들의 파편에 가깝다. 맥락 없는 진술 안에 어떤 사적인 의미를 밀봉한 것처럼 보이나 그래서 무슨 뜻인지는 알 길 없다. 인터넷에서 그의 문장들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은유적인 시, 비밀사교집단의 암구호, 다가올 재난들에 대한 예언 등등. 그런 식으로 사람들은 그의 수상한 정체를 추측해볼 뿐이었다.      


문장들을 제외하면 그에 대해 짐작할 단서는 없다. 우체국을 그만둔 뒤로 그는 세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몇몇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의 사생활을 캐고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사생활은커녕 그를 말해줄 가족도 지인도 연인도 드물었다. 가끔 학창시절을 함께한 이들이나 전 직장동료들이 등장했지만, 그들도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정해진 자리에 앉아있던 흐린 인상의 사람 정도로 떠올릴 뿐이었다. 무엇이든 밝혀낸다는 컨셉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선 프로파일러와 문화평론가 나상봉과 무당이 등장해 그의 정체를 밝혀내려 했다. 프로파일러는 그를 사회적 관계맺기를 두려워하는 회피성 인격장애자로 추측했다. 문화평론가 나상봉은 데이비드 샐린저, 토머스 핀천 같은 은둔형 소설가들을 언급하며 은둔 상태에서 온전히 자신을 대면하며 창의성을 발휘하는 부류의 예술가라고 말했다. 무당은 눈을 뒤집고 부르르 떨다가 다섯 살 소녀의 목소리를 내며 말하길 그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라고 했다. 그림자에 너무 오래 머무른 나머지 더 이상 자신을 그림자와 구분할 수 없게 됐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항의와 함께 곧 폐지됐다.       


그의 티셔츠가 세상에 알려진 건 알앤비에 덥스텝을 접목한 싱어송라이터이자 해체주의 패션디자이너이자 충동적인 행위예술가인 전지구적 문제아 앤더슨장이 자신의 20SS 패션쇼에서 그의 티셔츠를 선보이면서였다. 앤더슨장은 해체주의적으로 찢어발겨진 검은 자켓 안에 그의 티셔츠를 입고 피날레 무대에 섰다. 그의 문장은 찢어진 옷감 사이로 간신히 드러났다. 사람들은 티셔츠에 적힌 문장을 찾아 헤맸지만 앤더슨장의 룩북에 그런 피스는 없었다. 티셔츠의 정체를 묻는 글들이 12개국의 언어로 구글에 쏟아질 무렵, 앤더슨장의 인스타그램에 피드가 업로드된다.      


이 티셔츠는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주 속을 떠도는 소립자다. 세상의 범람하는 의미들 속을 떠돌던 한 개인의 작고 내밀한 진실이다. 나는 의미로 가득찬 무대 위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된 청중 앞에서,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의미를 발화했다. 이제 이 사소한 고백들은 나에게도 당신들에게도 의미있는 것이 되었다.       


글과 함께 업로드 된 티셔츠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오른쪽 엉덩이에 왕점이 생겼다.     


곧 세계 곳곳에서 자신의 엉덩이에 왕점이 생겼다는 고백을 걸치고 다니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가 열 장의 티셔츠를 만들 때 세계에는 수만 장의 이미테이션들이 생겨났다. 베이징의 지하상가에선 올라가 엉덩이 완전히 생기있게 따위의 오역된 이미테이션들이 판매되기도 했다.         


그가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낸 처음이자 마지막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생활은 다음과 같다. 매달 하나의 문장을 선택해 열 장의 티셔츠를 만든다. 흰색 무지 티셔츠들을 벌크로 구매해 쌓아두고 지하실에서 직접 틀 날염으로 프린팅 한다. 티셔츠는 그가 독학해서 개설한 간소한 형태의 웹사이트에서 판매된다. 티셔츠의 가격은 그가 열 장의 티셔츠를 팔아서 남긴 수익으로 한 달을 연명할 수 있는 수준으로 책정된다. 먹고 사는 데 그 이상의 노력은 하지 않으며 남은 시간은 흘러가는 대로 산다.      


이 인터뷰는 강박증적인 구석이 있는 문화평론가 나상봉의 집요함이 이뤄낸 쾌거였다. 나상봉은 일 년여에 걸쳐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몸담고 있는 매거진과 기고 지면들과 잡다한 SNS 채널들을 통해 끊임없이 그를 언급했다. 그가 티셔츠를 통해 표현하려는 의도, 사상, 세계관에 대해 자기만의 해석을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풀어놓곤 했다. 나상봉은 자신의 생각을 전할 창구가 많은 사람이었고 그럴듯한 해석을 꿰어 맞추는데 능했기 때문에 점점 대중은 나상봉이 말하는 대로 믿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상봉의 해석은 그의 티셔츠를 대변하는 정설처럼 간주되었다. 나상봉이 지금은 폐지된 한 공중파 예능에서 그에 대해 떠들어댄 다음날, 나상봉의 메일함으로 낯선 메일이 도착한다.      


약속장소는 거의 방치된 채 간헐적으로 공사가 치러지는 서울 외곽의 재개발촌이었다. 빈 집과 허물어진 담벼락 속에서 지도 앱을 더듬어가던 나상봉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 나상봉의 머리에 포대를 뒤집어 씌웠다. 나상봉은 급하게 들이킨 숨을 천천히 내쉬며 말했다. 단지 몇 마디 나누고 싶었을 뿐이라고. 인터뷰에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을 거라고. 나상봉은 얌전히 손목을 붙들린 채 후미진 골목으로 끌려갔다.      


거친 접근법과는 달리 그는 나상봉의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일상생활은 어떻게 보내는지. 티셔츠는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지는지. 하지만 대화가 계속될수록 나상봉은 그가 정작 중요한 질문에는 제대로 답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티셔츠를 만들지 않을 땐 무얼하고 지내냐는 질문에는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산다고 했다. 왜 원사이즈만 판매하냐는 질문에는 내 몸에 제일 잘 맞는 사이즈만 판다고 했다. 왜 티셔츠를 열 장만 만드냐는 질문에는 하나의 문장을 티셔츠 열 장 정도의 파장으로 세상에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소득 없이 이어지는 대화에 인내심이 희박해진 나상봉이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그 티셔츠로 뭘 어쩌고 싶은 거냐고요. 저편에선 잠자코 말이 없었다. 계속 대화를 시도하던 나상봉은 문득 깨달았다. 그는 이미 떠났다는 것을. 자신은 머리에 포대자루를 쓰고 양손이 청테이프에 감겨 등 뒤에 묶인 채 혼자 남겨졌다는 것을. 나상봉은 한참을 버둥거린 끝에 겨우 청테이프를 끊고 포대자루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발치에 놓인 티셔츠 한 장이 보였다. 한 줄의 문장이 적혀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너처럼     


잠시 후 나상봉은 흙먼지를 뒤집어쓴 셔츠를 벗고 티셔츠를 입었다. 티셔츠의 사이즈는 나상봉에게도 잘 맞았다. 밖은 이미 어둡고 바람이 불고 돌아갈 집은 멀고 가끔 고양이가 울었다. 나상봉은 집으로 돌아와 티셔츠를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머릿속을 더듬었다. 오늘 있었던 일련의 소동들을 어떻게 편집해야할지. 그와 나눈 대화를 어떤 해석으로 끌고 가야할지. 그건 모든 하루를 의미 있는 것으로 갈무리하기 위한 나상봉만의 취침 전 루틴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쉽지 않았다. 생각의 길목마다 가슴에 얹힌 문장이 턱턱 길을 막아섰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 너처럼.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처럼. 나상봉은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세상의 누구도 그에 대해 말해줄 수 없다면, 그 스스로도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어떻게 그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어쩌면 김슬기 씨가 말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슬기 씨는 남들보다 그를 조금 더 잘 안다. 한때는 그가 점심시간에 어디로 사라지는지 아는 정도였지만, 이젠 그의 얼굴 위 점들의 위치와 잠버릇을 안다. 아직 곁에서 잠들어있는 사람의 얼굴을 지켜보는 아침이 반복되면 알게 되는 것들이다. 둘은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열다섯 평의 집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김슬기 씨도 그가 왜 티셔츠를 만드는지는 모른다. 한 번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 나눈 적이 없다. 다만 함께 산책을 할 뿐이다. 함께 넷플릭스를 보기도, 함께 긴 대화를 나누기도, 그러다 가끔은 각자의 작은 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가끔은 함께 티셔츠를 만들기도 한다. 함께 이 달의 문장을 선택하기도 한다. 김슬기 씨가 맘에 드는 문장을 골라주기도 하고, 눈 감고 펼친 수첩의 페이지에서 문장을 고르기도 한다. 그는 가끔 카레를 만들기도 한다. 노란 소스 속에 하트모양으로 잘라낸 당근을 숨겨놓고, 한 냄비의 카레소스가 동날 때까지 김슬기 씨가 하트모양 당근을 발견하기를 기다린다. 그런 방식으로, 둘은 사람들의 기대와 무관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 시간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티셔츠에 적히지 않는다.



(2020.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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