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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먼지쥬스 Sep 01. 2021

[소설] 양떼 목장

팔 년 전, 공원에서 풀을 뜯는 김 부장을 발견했다.

팔 년 전 사회초년생 시절에 겪은 일이다.


여느 때처럼 출근중이었는데 회사 인근의 공원에서 네 발로 기어다니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풀밭에 얼굴을 묻은 채 열심히 풀을 뜯어먹고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보니 옆 팀의 김 부장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를 발견한 김 부장은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아... 속이 불편해서. 요새 채식해."


그날 김 부장은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시간에 출근했다. 

흰 와이셔츠에 녹색 풀물을 묻힌 채였다.

얼마 뒤 김 부장은 조용히 회사를 관뒀다. 건강이 나빠져 요양을 하러 갔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사회초년생 시절을 지나 몇 곳의 회사를 거쳤다.

지난 회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둘을 반반 닮은 딸아이가 생겼다. 

딸은 이제 막 말이 트여 많은 것들에 손가락을 내밀고 이거 무야? 하고 묻곤 했다.


우리는 얼마 전 여름휴가로 평창을 떠났는데 돌아오는 날 아내가 양떼목장을 가보자고 했다.

나는 오래 전 다른 여자와 거길 가봤다는 말을 굳이 하진 않았다.


하얗고 복실복실한, 묘하게 웃는 상을 한 생명체들 앞에서 딸은 또 한번 손가락을 내밀었다.


"이거 무야?"


"이건 양이라고 해."


"이거 무야?"


"이것도 양이야. 야앙. 따라해봐."


"이거 무야?"


"이것도......"


하지만 이번엔 바로 답을 할 수 없었다. 

흰 털들 사이로 나타난 유난히 억세보이는 검은 털의 그것에 뭐라 이름을 붙일지 망설여졌다. 

나는 네 살박이 딸의 심정으로 손가락을 내밀고 잠시 후에 대답할 수 있었다.


"이건... 김 부장님이야."


나는 팔 년 전의 공원에서처럼 그것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것은 나를 향해 고래를 돌렸다.

분명히 김 부장이었다. 

온몸이 반곱슬의 검은 털에 뒤덮여있고 양처럼 묘하게 웃는 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사람의 얼굴이란 쉽게 잊혀지는 것이 아니었다. 

김 부장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김 부장을 쓰다듬었다. 의외로 폭신하고 부드러웠다. 


문득 묻혀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김 부장이 회사를 떠나던 날, 나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와 마주쳤다. 

내가 형식적인 작별인사를 건네자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 살다보면 또 보겠지. 그땐 내가 잘 부탁하네."


그게 이런 뜻일 줄은 몰랐는데. 

나는 조금 더 정성스럽게 김부장의 털을 쓰다듬었다. 쓰다듬으며 말을 걸었다. 김 부장님, 저 기억 안 나세요? 김 부장님, 여기서 이러고 있으셔도 돼요? 김 부장님, 가족들이 안 찾아요? 김 부장님, 그거 먹어도 배탈 안 나세요? 김 부장님, 저기요, 안 들려요? 

그때 목장주인이 다가와 말했다. 


"양은 말을 못 알아들어요."


"이 분은 김 부장님인데요."


"이 양의 이름은 레이첼입니다."


목장주인은 레이첼의 양털이 유니크하다며 레이첼의 양털로 만든 검은 후리스를 추천했다. 

믿기지 않게도 목장의 인기 상품이라고 했다. 멀미가 났다.

아직 양떼를 구경하고 있는 아내와 딸에게 잠시 눈 좀 붙이겠다 말하고 차로 돌아왔다. 

등받이를 제끼고 누워있으니 잠이 쏟아졌다.


잠시 후 돌아온 아내의 손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레이첼의 양털 후리스 세 벌이 들려있었다.


"예쁘지? 한 벌씩 샀어. 애들 것도 있더라..."


"하지 마!"


"어?"


"하지 말라고! 애한테 그런 거 입히지 말라고!"


아내는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냐며 화를 냈다. 딸이 울었다. 나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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