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14개월이 되었을 무렵 다시 회사에 입사했다. 커리어를 유지하고 싶어서는 아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신혼부부 특별공급으로 청약을 넣어 공공분양을 받았는데 입주 후에는 대출에 대한 고정비가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나와 남편은 아이를 낳기 전까지 여유롭지는 않지만 알뜰살뜰하게 가정을 꾸릴 수준의 연봉을 벌었다. 하지만 앞으로 매달 백만 원의 고정지출이 발생할 예정이었다. 우리 형편에 백만 원은 타격감이 큰 액수였다. 더군다나 당시 나는 출산과 육아로 퇴사해 소득이 없는 상태였고 남편의 벌이만으로는 생활비만 겨우 충당하고 있었다. 외벌이는 빠듯한 게 아니라 불가했다. 일을 해야 했다.
반드시 맞벌이를 해야 한다면 적게 일하면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다. 마침 한 회사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다. 대표님은 아이 셋을 둔 워킹맘이었는데 면접 시 나의 상황을 듣고는 일 6시간 근무조건을 맞춰주겠다고 했다. 회사가 신규로 확장하는 분야에서 필요한 역량을 내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딜이었다. 짧지 않은 면접 시간 동안 대화는 ‘일하는 엄마에 대한 유대감’으로 흘러갔다. 대표님은 말했다. 지금은 힘들겠지만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육아와 일을 병행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거라고. 아이는 금방 큰다고. 어차피 일을 안 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 그 말을 어느 정도 믿어보기로 했다. 통상 근무시간보다 2시간을 덜 일하는 것에 대해 연봉을 어느 정도 삭감하고 입사를 결정지었다. 모든 상황이 100%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내 상황에서는 최선의 전개였다.
남들보다 2시간을 덜 일하면서 퍼포먼스는 동일하게 내야 했기 때문에 업무 시간은 초를 다투어 일하는 것의 연속이었다. 풀액셀을 밟으며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다시 부스터를 맞은 것처럼 육아를 해야 했지만 행복했다. 매 순간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다는 감각이 나를 생생하게 휘감았다. 분명 고되었지만 그동안 바라고 바라왔던 삶에 마침내 도달했구나 싶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한지 열 달이 지났다. 엄마, 아빠 정도만 말하던 아이는 그새 ‘하나님 감기 낫게 도와줘 아멘’, ‘엄마 많이 많이 사랑해요’, ‘아기돼지 삼 형제 얘기해 줘 나쁜 늑대랑’ 등의 문장을 구사할 정도로 컸다. 그리고 형아가 되었다! 날마다 불러오는 엄마의 둥근 배를 만지며 ‘안킹(둘째 태명이 안식이 인데 아직 발음이 안돼서 안킹이라고 부른다)아 뭐 하니? 형아 오토바이 봐봐 이쁘지' 했다.
퇴근해서 집에 올 때마다 아이는 자라 있었는데 아픈 만큼 큰다고 많이 아프기도 했다. 보육기관 방침상 열이 나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다. 또 축 쳐진 아이를 어디 보낼 수도 없는 게 엄마의 마음이다. 회사 동료들의 연령대는 30대 초반이었지만 유일한 기혼자 및 부모는 나뿐이었다. 나에게만 특수한 상황이 펼쳐졌는데 가령 아이가 아플 때나 입덧으로 사경을 헤맬 때 등이었다. 이를 이유로 회사에서 유일한 재택근무자가 되었다. 대표님과 입사할 때 협의한 일종의 스톡옵션인 셈. 동료들의 배려와 제도를 이용해 일과 육아를 이어갔다. 아이는 가끔 열이 나고 거의 매일 콧물을 달고 살았다. 일과 육아 모두 못하는 것 같다가도 또 둘 다 잘 해내는 것 같은 간극 사이에서도 시간은 흘렀다.
만삭이 되어 출산휴직을 들어갔다. 때마침 회사는 전사적으로 저출산 캠페인 기획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동료들은 유일하게 자녀를 낳은 경험이 있는 내게 여러 가지 인터뷰를 했다. 일종의 여론조사랄까?
돈이 없어서, 아이를 낳으면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마음은 어떤 건지 말해달라고 했다.
이십 대 시절, 내가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에 대해서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결혼을 한다면 아이는 무조건 가질 생각이었다. 그것도 꼭 둘을. 이 확고한 신념은 나의 원가정에서 기인한 것 같다. 객관적으로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가정환경이었지만 연년생인 동생이 있어서 그 시간들을 같이 맞대어 지나올 수 있었다. 부모보다 강한 형제와의 유대감. 아이를 낳는다면 꼭 둘을 낳아 서로에게 좋은 선물이 되게 해주고 싶었다. (물론 삶이 꼭 내가 뜻한 바 대로 흘러가지는 않지만)
아무튼 아이를 낳지 않는 시대정신에 대한 나의 대답은 그다지 유의미한 인터뷰가 되지는 못한 것 같다. 얼마 후 기사에서는 서울시가 출산율 0.59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그날은 내가 둘째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고, 1월에 태어난 아이가 많아 미리 예약해 둔 조리원에 방이 다 차서 입소를 할 수 없다는 연락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아니, 저출산이라며? 왜 나 조리원에 못 들어가는 거지?
갑작스레 전달받은 통보에도 나름 무덤덤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를 낳고 나서 2주간 있었던 조리원에서의 기억이 남들이 다들 말하는 마냥 ‘천국’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격상 방 안에서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것을 답답해하기도 했지만 아이와 떨어져 쉼 아닌 쉼을 누리다 집으로 왔을 때 이 갓난아이를 두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패닉 상태가 되었던 게 좀 영향이 컸다. 아기는 태어나면 생후 2주까지 먹고 자기만 하다가 그 이후부터 배앓이, 용쓰기, 안 자고 버티기 등 여러 변화를 겪는다. 태어나서부터 24시간 모자동실을 하며 아이의 변화와 기질을 파악한다면 이 시기를 보다 현명하게 지낼 수 있겠지만 나는 조리원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를 손쉽게 맞이할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생각이 두고두고 들었다. 그래서 조리원에 자리가 없다는 말에 남편과 별 이견 없이 바로 집으로 가자고 결정 내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 찜찜한 기분은 무엇일까. 무언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류가 대대로 이어온 자식을 낳는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소멸하고 있다는 것과 상당한 고가의 가격대를 형성한 조리원에 자리가 없어서 못 들어가는 일명 출산 프리미엄화가 동시에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아이를 키우는 일은 대한민국에서는 이해타산에 맞지 않는 일인가? 생명을 낳아 기르는 것이 이해타산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일까? 돈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은 불가능할까? 혹은 불행할까?
그래서 기록해 보기로 했다. 아이 낳아서 키우는데 얼마나 들까? 그게 돈이든 품이든 말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가정은 벌이가 넉넉하지는 않다. 운 좋게 청약이 되어 내 집 마련을 하긴 했지만 이 집이 온전한 우리 소유가 되려면 은행대출을 30년 동안 갚아나가야 한다. 대신 품이라면 여유가 있는 편이다. 아직 육체가 건장하고 정신도 맑다. 무엇보다 육아를 함에 있어서 나름의 소신이 있기 때문에 세상 기류에 치우치지 않고 아이를 키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다.
아이 둘을 키우는 나의 경험담이 ‘돈이 없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말에 적어도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로 앞으로의 글을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