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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 Mar 19. 2024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해

<패스트 라이브즈>_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

패스트 라이브즈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인물이 있다. 다정하게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와 어쩐지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두 사람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기만 하는 한 남자. 곧이어 먼발치에서 세 사람의 관계를 유추하는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정히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가 남매 같다고 추측하기도 하고 여행 온 관광객 커플과 여행 가이드라고 상상해보기도 한다. 마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듯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여자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관계를 유추하는 남녀를 더 나아가 그 너머에 존재하고 있는 카메라를 응시한다. 앞으로 세 사람 사이에 얽혀 있는 인연의 끈을 천천히 풀어내겠다는 심산으로.


12살의 어느 날, '해성'의 인생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 첫사랑, '나영'. 12년 후, '나영'은 뉴욕에서 작가의 꿈을 안고 살아가다 SNS를 통해 우연히 어린 시절 첫사랑 '해성'이 자신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한 번의 12년 후, 인연의 끈을 붙잡기 위해 용기 내어 뉴욕을 찾은 '해성'. 수많은 "만약"의 순간들이 스쳐가며, 끊어질 듯 이어져온 감정들이 다시 교차하게 되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기억일까? 인연일까?


항상 반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는 나영은 처음으로 해성에게 일등 자리를 빼앗기게 되어 심통이 난다. 한껏 툴툴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해성과 나영은 언제나처럼 내일을 기약하며 갈림길에서 인사를 나누며 헤어진다. 무언가를 떠나보내면 새로운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나영의 엄마의 말처럼 나영의 가족은 한국에서의 삶을 모두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준비 중이다. 아직 이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영영 보지 못할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한 나영은 그저 맘에 쏙 드는 새로운 이름을 짓기 바쁠 뿐이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들뜬 마음으로 친구들과 이별의 인사를 나눈 나영은 혼자 먼발치 앞서 걸어가는 해성을 뒤따라간다. 새롭게 맞이하게 될 미국에서의 삶에 도취된 나영은 한국에 혼자 남겨질 해성의 마음은 알 길이 없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내일을 기약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던 갈림길 앞에서 나영과 해성은 후회로 남겨질 첫 번째 이별을 무심히 맞이하게 된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르고, 우연히 SNS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되찾게 된 해성과 나영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기라도 하듯 매 순간순간을 공유하기 바쁘다. 시험기간이 언제인지 오늘 누굴 만났는지 아직 먹지 못한 저녁 끼니를 걱정하기도 하며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진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의 거리감만큼이나 둘 사이에는 아직 정의 내리지 못한 감정들이 잔뜩 쌓여있다.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가까운 사이 같다가도 인터넷이 끊겨버리면 얼굴을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만날 수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다시 연락을 닿게 된 것만으로도 기쁜 해성과 달리 미국에서의 삶을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노라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영영 가까워질 수 없다는 서운한 감정을 느끼며 점점 지쳐간다. 누군가 조금만 용기를 내었다면 닿을 수 있었던 감정의 거리를 끝내 좁히지 못한 두 사람은 글작업을 위해 떠났던 공간에서 공부를 위해 떠났던 중국에서 각자의 인연을 만나게 된다.


어쩌면 인연이라는 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 맞이하게 될 인연은 이미 정해져 있고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정해진 시간 흐름에 따라 그 일을 맞이하고 있는 거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어떤 일은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우리 앞에 일어나고 우리는 갖가지 이유들을 만들어내다 끝내 지친 마음으로 겸허히 맞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은 것들 앞에서 도저히 이유를 만들어낼 수 없는 순간들 앞에서 우리는 그저 인연이 아니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야속한 운명 앞에 변명을 만들어내고 싶어서일 수도 있겠다. 너와 나 사이에는 딱 이 정도의 인연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또다시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해성은 나영을 만나기 위해 미국땅을 밟게 된다. 미국에 있는 내내 비가 올 거라는 친구들의 비웃음을 뒤로한 채 미국에 도착한 해성은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그때의 그 나영과 비로소 재회하게 된다. 이제는 나영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오직 해성과 엄마 밖에 없다는 노라의 왼손 약지 손가락에는 세월의 흔적이 묻은 반지가 끼워져 있다. 기대감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감정 속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노라와 해성은 노라의 남편인 아서와 함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아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말로 아서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는 서로에 대한 감정을 시간이 한참 흐른 24년이 되어서야 되돌릴 수 없는 가정들로 짙은 후회를 나열하기 시작한다. 만약에 지금의 우리가 전생이라면 다른 생에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인연이었을까.


우리는 누군가를 온전히 알 수 있을까. 수시로 주고받는 연락 속에서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그 사람의 하루를 알 수 있다. 오늘 누굴 만났고 그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눴고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하지만 한편으론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오늘 만난 사람 앞에서 지었던 표정을 대화 속에 녹아들어 있던 수많은 감정을 하루를 관통하는 시간 속에서 시시각각 변하였을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우리는 영원히 알 길이 없다. 늦은 밤, 노라와 마주 보며 누워있던 아서는 나지막이 말한다. 당신은 잠꼬대를 꼭 한국말로 한다고. 전혀 몰랐다고 말하는 노라에게 아서는 다시 말한다. 당신이 한국말로 하는 잠꼬대를 나는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이렇게 가까이 내 몸처럼 붙어있는 당신에게서 영영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게 무섭다는 듯이 아서는 담담히 노라를 꼭 끌어안는다.


이제는 미국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해성은 노라의 배웅을 받으며 택시를 기다린다. 영원히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택시를 기다리며 해성과 노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오직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만 한다.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서로에 대한 원망을 서로에 대한 아쉬움을 나누는 찰나의 순간이 흐르고 택시는 두 사람 앞에 도착한다. 해성을 떠나보낸 노라는 아서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다시 현재의 삶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이제는 나영이 아닌 노라인 자신을 상기시키며. 어릴 적 사랑인 해성이 아닌 언제나 자신을 믿어주고 안아주는 아서를 향해. 그저 일어나 버린 이 모든 일들을 노라는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운명으로 이어진 인연의 끈 앞에 도망칠 수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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