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주인>_아픔 대신 사랑을 택한 세계의 주인이들에게.
우리의 이미 시작된 세계는 처음으로 영영 되돌아갈 수 없다. 게임처럼 ‘시작’ 버튼 하나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할 수도 없고, 영화 속 장면처럼 힘들고 비통한 시간을 모두 건너뛰고 컷 전환 한 번으로 불쑥 자라난 내 모습을 한 채 가슴 설레는 다음 챕터를 향해 넘어갈 수도 없다. 이미 시작되어 버린 세계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세계를 뒤흔들만한 사건을 겪게 되는 것과도 상관없이 왜 그 일을 겪어야 했는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한 마디 변명도, 설명도 해주지 않은 채 그저 지난한 시간을 속속들이 경험하며 흐르고 흐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세계 속에는 어떠한 사건을 겪기 전의 내 모습을 까마득하게 까먹게 만들기도 하고 나약한 내 모습에 허둥대기도 하고 모든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아 남몰래 고통을 감내하거나 누군가의 고통을 옆에서 묵묵히 바라보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과 세계 속에서 부단히 나를 지키고 인정하고 용서하며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선택을 거듭해나기도 한다.
반장, 모범생, 학교 인싸인 동시에 연애가 가장 큰 관심사인 열여덟 ‘이주인’. 어느 날, 반 친구 ‘수호’가 제안한 서명운동에 전교생이 동참하던 중 오직 ‘주인’만이 내용에 동의할 수 없다며 나 홀로 서명을 거부한다. 어떻게든 설득하려는 ‘수호’와 단호한 ‘주인’의 실랑이가 결국 말싸움으로 번지고, 화가 난 ‘주인’이 아무렇게나 질러버린 한마디가 주변을 혼란에 빠뜨린다. 설상가상, ‘주인’을 추궁하는 익명의 쪽지가 배달되기 시작하는데……. 인싸? 관종? 허언증? 거짓말쟁이? “이주인, 뭐가 진짜 너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두운 교실 안에서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주인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남자친구와의 은밀한 스킨십에서 꽤나 적극적인 주인은 한창 이성에 눈을 뜨게 되는 또래들과 다르지 않게 자신의 욕망을 찾고 표현하는 것에 솔직한 듯 보인다. 활달하고 능청스러운 성격 탓에 남녀를 가리지 않고 반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주인은 선생님에게도 언제나 알아서 잘하는 학생이라는 믿음을 주는 건실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등학생이라는 나이에 맞게 지금 인생의 가장 큰 고민은 남자친구와의 관계나 앞으로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전부일 것 같은 주인 앞에 지금껏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과거의 일을 다시금 마주하게 될 사건 앞에 놓이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삶 속에서 무수한 사람을 마주하고 그만큼의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떠한 경험은 누가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먼저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훈장 같은 사건이 되기도 하지만 어떠한 경험은 그 사건으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견고하게 규정되거나 정의 내려질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굳게 닫게 만들기도 한다. 내가 겪은 사건과 상처는 주관적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너무도 객관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릴 적 친족 성폭력을 당한 주인은 그 아픔과 상처에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누구보다 뚝심 있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려가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체화된 기억에 멈칫하게 되는 순간도 있지만 주인은 그 사건의 아픔에서 이미 한걸음 나아가 앞으로 자신에게 펼쳐질 미래를 그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을 위축시키고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태도이다. 그런 일을 당해서 이런 성격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는 혹은 그런 일을 당했으면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그 판에 박힌 인식들이.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상처를 소음으로 가득 찬 세차장 안에서만 자유로이 쏟아낼 수 있던 주인은 비로소 자신의 힘든 상처를 사람들에게 꺼내놓게 된다. 하지만 어쩐지 주인은 죄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친한 친구에게 솔직하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나의 아픔으로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그 과도한 친절함이, 어느새 사람들에게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그 불편함이 주인을 그 사건 속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낙인처럼 바라보는 사람들 속에서 주인은 자신의 상처를 돌볼 새도 없이 내내 미안해하기 바쁘다.
어두운 밤 공원을 산책하고 있는 주인에게 미도는 말한다. 진짜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게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다들 쉽게 하는 것 같은데 나한테만 유난히 어렵고 잘 안 되는 것이 있냐고 재차 묻는다. 곰곰이 생각하던 주인은 사랑이라고 대답하고 미도는 용서라고 대답한다. 내가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 힘이 든다고. 하지만 아직 살아 있으니 노력해야겠다고 미도는 담담하게 덧붙인다. 이 장면이 영화의 어느 장면들 가운데에서도 내내 잔상으로 남았던 이유는 주인이 자신의 상처에는 밝고 담담하게 연신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안위는 수없이 관찰하고 용서하고 위로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용서라는 단어는 가해자에게 부여될 말이 아니라 피해자 스스로에게 필요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자꾸만 스스로에게서 상처의 원인과 이유를 찾는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쓰여야 될 말일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픔을 공개하고 난 주인의 삶은 달라진 것이 없다. 모든 고통과 아픔을 적은 상자를 마술로 사라지게 만드려 했지만 끝내 바닥에 쏟아져버린 해인의 마술처럼. 주인이 겪은 아픔은 여전히 없었던 일처럼 사라지지 않겠지만 주인은 변함없이 집안 곳곳을 누비며 깨끗이 집 안을 닦고 그만큼 자신의 마음도 닦아내며 지금보다 더 자세히 사랑에 대해 관찰하고 경험할 것이다. 그리고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며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걷는 주인을 바라보며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 스스로를 용서하고 용기를 내게 될지도 모른다. 남몰래 남긴 쪽지처럼.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모든 주인이들이 용기 내며 살아갈 수 있길 바란다. 덧, 주인이에게 노래 루시드폴 - 용서해 주오를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