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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앙 Feb 17. 2024

남자 혼자 사는 자취집에 웬 양문형 냉장고??

나에겐 꿈이 있었다.

냉장고를 사용하지 않는 삶..

전기 쓰는 냉장고 대신 옛날 인도식으로 음식을 저장하고 싶었다. 두 항아리를 이용해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이다. 큰 항아리와 그보다 약간 작은 항아리를 겹친 후 그 사이에 모래를 넣그 모래에 물을 부은 뒤 젖은 타월로 덮으면 된다. 뙤약볕 아래에서도 항아리 안이 시원하게 유지돼서 식품을 보관할 수 있다. 냉동실이 필요하다면 얼음과 소금이 있으면 된다. 얼음과 소금으로 내부를 채우면 생선도 꽁꽁 얼릴 만큼 성능이 좋다. 한 번도 해본 적 없 유튜브에서 본 방법이다. 언젠가 나도 냉장고 없는 삶을 살아봐야지 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출처 : youtube, dish a day


그런데 이 남자는 혼자 사는 자취집에 800리터짜리 양문형 냉장고를 가지고 있던 것이다. 반면, 그가 우리 집에 처음 놀러 왔을 때, 이 여자는 왜 저렇게 다 낡아빠진 작은 냉장고를 사용할까라고 생각했단다.


왼쪽) 내 중고 냉장고, 오른쪽) 남편 자취할 때 산 최신형 냉장고


어느 날 결혼을 앞두고 그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큰 걸 써?"

그가 말했다.

"이거 살 때 당시 리미티드 한정판이었어. 봐봐~ 좋지?"

왜 큰 걸 쓰는지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고 한정판임을 자랑한다. 다시 물었다.

"결혼하면 내 냉장고로 바꿔도 돼?"


"안돼!"


그는 단호했다. 결혼 전, 내 말이라면 항상 yes일 때였는데도 말이다. 최신 양문형 냉장고를 버리고 3년 전 중고로 산 냉장고로 바꾸자는 건 일반인들의 이치에 어긋나긴 하다.


내 논리는 이것이다.


작은 냉장고를 사용하면,

필요한 양만큼 사 먹게 돼서 음식물 쓰레기도 덜 나온다. 전기세도 적게 들어 돈도 아낀다.

자리를 덜 차지하니 집을 넓게 사용할 수 있다.


그의 대응 논리는


큰 냉장고가 되려 경제적이고 환경친화적이라는 것이다. 옛날 낡은 냉장고에 비해 에너지 등급이 월등히 높고 최신 기술력으로 적은 에너지로 신선도가 오래 유지되어 되려 음식물을 오래 보관할 수 있다. 단순히 크기만 비교할 게 아니라 실제 소비전력과 기술력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말로 먹고사는 선생 아니랄까 봐 내 논리가 씨알도 안 먹힌다. 결국 그의 큰 냉장고를 선택했다.


 문 열자마자 시커먼 냉장고부터 보여 답답하긴 했지만 확실히 음식 재료가 오래가긴 했다. 칸막이가 많으니 물건을 분리해서 보관하기가 좋았다. 가전은 무조건 큰 게 좋다더니 과연 그랬다.


 그렇다고 너도나도 점점 덩치를 키우는 냉장고에 익숙해지기 싫었다. 큰 냉장고로 갈아타는 대신, 음식은 먹을 양만큼만 사고 꽉 채우진 않기로 했다. 1년 동안 잘 지켰다. 800리터 냉장고의 반도 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떨이 상품이나 1+1 이벤트 상품에 현혹되지 않고, 고기는 냉동실이 아닌 냉장고에 보관할 양만큼만 사니 냉동고는 냉장고보다 더 텅텅 비었다. 그렇다고 먹을 게 없진 않았다. 항상 먹을 것은 풍족했다. 결국 남편도 냉장고가 무조건 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결혼하고 1년 뒤 조금 큰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기존 냉장고는 형님에게 드리고 우리는 새것으로 사기로 했다. 이번에야말로 작은 냉장고로 갈아 탈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엘지든 삼성이든 양문형 냉장고뿐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단종되었지만 재고 소진으로만 팔고 있던 엘지 400리터짜리 냉장고를 찾았다!! 다행히 지난 1년 동안 냉장고의 반을 텅 빈 채 써왔기에 남편 400리터짜리 냉장고를 사는 것에 동의했다. 양문형 냉장고에 버금가는 기술력에 덩치가 작으니 에너지효율은 1등급이었다. 이렇게 좋은 제품이 왜 단종이 됐을까. 점점 큰 냉장고만 찾는 소비자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덕분에 원가의 거의 반 값으로 살 수 있었다.


 2년 정도 사용하고 있는데, 이 400리터 냉장고마저도 꽉 차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정리도 하고 여전히 이벤트 상품에 현혹되지 않는다. 까만 비닐봉지에 음식을 보관하지 않는다. 검색창에 재료만 넣어도 알차고 간단한 레시피가 가득해서 냉장고 파먹기를 즐겨한다. 300리터짜리 냉장고 있었으면 좀 더 도전적인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남편과 살림을 합친 지 1년 만에 냉장고 덩치를 반으로 줄였다. 이렇게 한 단계씩 밟아 나가다 보면, 세상 모든 전자 제품을 갖고 싶어 하는 남편과 냉장고 없는 삶을 실현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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