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동생에게 연락을 받았다. 선생님께서 반장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를 물어보셨고,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친구들이 열다섯 명이라고 한다. 반 전체 인원이 스무 명이다. 눈치게임도 이 정도면 나가리일 텐데 아무리 욕심 많은 미래의 새싹들이 모인 공간이라지만 SKY캐슬이 괜히 나온 드라마가 아니었구나 싶었다.
순간 아이를 가진 친구들의 얼굴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혜 닮았으면 ○○이도 분명히 똑똑할 텐데' 하는 생각과 동시에 미래의 내 친구들에게 음소거로 응원 텔레파시를 보내 보았다. 어쨌든 열다섯 명의 아이들이 아기 까치처럼 입을 모아 공약을 발표했고, 내 동생은 장렬히 전사했다. 약 5분간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표출하다가 이럴 시간이 없다며 학교 홍보대사 지원서를 쓰러 가는 걸 보니, 다이렉트로 꽂힌 피는 아니지만 돌고 돌아 내 피가 저기로도 흐르고 있긴 한 것 같았다.
작음이는 어린 시절 반장을 도맡았다고 한다.
*작음이: 남자 친구(키가 작음/얼마 전 처음으로 테니스 코트에 나갔다가 바람 탓을 하며 돌아옴)
애기 때 왜 이렇게 감투를 못 써서 안달이었냐고 물으니 "응? 난 지금도 감투 못 써서 안달 났는데?"라고 말하는 걸 보니 역시 사람은 태생적인 성향이 참 중요한 것 같다.
아이들의 군기를 잡겠다는 건지 궁디를 잡겠다는 건지
사람은 누구나 서로 다른 형태의 완장을 차고 있다. 사원증을 보며 저 사람은 회사원이겠구나를 생각하고 누군가가 열어 주는 차의 뒷문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면 높으신 양반이겠거니 짐작한다.
내가 가장 기피하는 완장은 꼰대다. 풀어헤쳐 버려도 스멀스멀 자동완성처럼 따라붙는 끈질긴 꼰대 완장을 떼어버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다. 얼마 전, '님'호칭을 도입한 사업부의 사원으로부터 메신저를 받았다. 정말 별 것도 아닌 말이었다.
"현타님, 말씀하신 부분이 ABC 맞으실까요?"
'현타님? 과장은 어디다 팔아먹고 현타님? 님자 쓰는 건 너네 사정이고 전사에 적용된 것도 아닌데 현타님?' 하는 생각이 폭풍처럼 밀려옴과 동시에 뒤이어 육성으로 "악!" 소리를 냈다. 진돗개 1호다. 또 나도 모르게 꼰대 완장을 차버렸다. 입버릇처럼 과장이 뭐라고, 팀장이 뭐라고, 임원이 뭐라고를 달고 살면서 그 와중에 대접은 받고 싶었나 보다. 그날 하루 종일 선후배들을 붙잡고 나 어떻게 하냐고 내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며 구원을 요청하고 돌아다닌 기억이 난다.
30대, 여자, 딸, 회사원, 프리랜서··· 오 지금 생각해 보니 나 또한 굉장히 많은 완장을 보유하고 있다. 사실 지위라기보다는 역할이라고 보는 게 맞지만 어쨌든 제법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는 듯하다. 아, 중요한 걸하나 빼먹었네. 글을 마치고 나면 아이스크림 꺼내놨으니 빨리 오라는 작음이의 여자친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