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1879년부터 1880년까지 연재된 러시아 소설로, 작품 속 분위기를 살펴보건대 근대의 끝무렵에서 신에 대한 의심과 개인에 대한 탐구는 이미 충분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종교의 신성함을 훼손하는 것은 표도르를 비롯한 소수지만, 조시마 장로가 죽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에서는 암암리에 신을 의심하는 심리가 사회에 만연히 퍼졌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유럽의 독일에서 프리드리히 니체가 <즐거운 학문>에서 '신은 죽었다'는 표현을 쓴 것이 그 점을 입증한다. 니체는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이 '신 자체를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말'이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신과 그를 통한 사고 체계를 부정하게 된 사실을 그대로 서술한 것이다. 근대 사회는 이미 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고, 신본주의로부터 벗어나 인간 중심주의가 확장되었다. 혹자는 중세와 근대의 경계를 집단의 명예에서 개인의 존엄으로의 전환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니체와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자 하는 바도 여기서 시작된다. 근대 이성이 과학의 언어로 신을 부정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신을 통해, 또 그를 믿고 섬기는 일을 통해 형성된 절대적 선의 가치와 사고 체계를 부정하는 것이 사회에 크나큰 문제를 던져주는 것이다. 니체는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라고 적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썼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꽤나 직접적으로, 텍스트의 초반부에서 제시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는 (구태여 구분선을 그리는 것이 적절치는 않겠으나) 중세 이전의 신성함의 영역에 서 있는 인물들이 꽤나 등장한다. 몇 명 등장한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수도원이라는 공간에 종속된다. 장로제도를 통해 장로의 임무를 수행하는 조시마, 그를 보좌하는 여러 신부들, 한편 신을 섬기면서도 장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신부들도 그곳에 있으며, 이 소설의 주인공 알료샤가 있다.
종교의 세계, 신본주의의 세계를 상징하는 수도원에서 절대적 지도자인 조시마 장로는 소설에 직접적으로 등장할 수 없는 하느님을 대신해 신적 존재로 기능한다. 일부 사람들이 장로 제도에 의구심을 가지고 그의 육체와 영혼의 신성함을 의심하고 공격하는 것은 곧 중세까지의 사회 구성원들이 상호 합의를 통해 존재하게끔 한 신을 이제는 다시 의심함으로써 약속을 파기하려고 하는 근대의 논리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수도원 안에서 조시마 장로에 적대를 보이는 자들은 곧 동일한 성경의 텍스트를 두고 다르게 해석해서 신을 다르게 그리는 것이고, 수도원 자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텍스트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믿음이 의심받고 수도원 외부의 실재하는 세계가 더 중요해진 시대를 확인하자 조시마 장로는 자신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는 알료샤를 수도원 밖으로 내보낸다. 조시마 장로는 죽기 전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던 자신의 형을 알료샤가 참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이제 그는 신을 닮고 좇으려는 것에서 벗어나, 훌륭한 인간과 닮은 것을 찾음으로써 '이상적인 인간상'을 찾아야 함을 인식한다. 알료샤는 그에 적합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작가는 조시마 장로를 자연사시킴으로써, '신은 죽었다'는 문장을 다른 방식으로 완성시킨다.
알료샤가 수도원을 처음 떠나려고 할 때, 파이시 신부가 그를 붙잡고 일러준 당부가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대신한다.
"꼭 명심해라. 속세의 과학은 커다란 세력으로 성장하여 현 세기에 이르러 성서에 약속된 모든 것을 재검토했다. 특히 속세의 학자들이 무자비하게 분석한 결과, 지금까지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던 모든 것이 그림자도 없이 소멸되고 말았어. 그러나 우리는 부분만을 검토하는 데 골몰하여 중요한 전체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그 맹점은 그야말로 놀라지 않을 수 없어. 그런데 그 전체로서의 완전한 모습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엄연히 버티고 잇는 지옥의 문, 즉 죽음의 힘도 정복할 수 없는 거야. 과연 19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오지 않았을까. 그것은 과연 사람들의 정신 속에, 대중의 생활 속에 존재해오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야, 그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에 예나 지금이나 존재하고 있어. 왜냐하면 기독교를 부정하고 종교에 반기를 쳐든 사람들조차 그 본질에서는 자기 자신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역시 똑같은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있어. 그 증거로는 그들의 지혜도, 그들의 정열도, 일찍이 그리스도에 의해 제시된 이상을 제외하고는 인간과 그 덕성에 어울리는 최고의 모습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거지. 비록 그런 시도가 있었다 해도 그 결과는 언제나 기형적인 모습에 지나지 않았어. 알료샤, 특히 넌 이 점을 잘 기억해두어야 한다. 너는 이제 곧 승천하시게 될 장로님의 분부에 따라 속세로 나가야 할 몸이니까 말이다. 앞으로 이 위대한 날을 떠올릴 때면 너를 떠나보내며 내가 너에게 마음으로부터 준 이 말을 기억해주리라 믿는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는 아직도 어린데 세상의 유혹은 너무나 강해서 네 힘만으로는 감당해내기 어렵지 않을까 근심스러워서 그런단다. 자, 그럼, 알료샤, 잘 다녀오너라"
도스토옙스키는 파이시 신부의 입을 빌려 무신론자들이 들고 있는 과학적 근거를 인정함과 동시에, 종교가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이상은 대체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여기서 작가와 텍스트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은 완결되었다고 본다. 소설에서의 이 장면 이후의 뒷부분은 주장을 받쳐주는 예시가 되는 서사다. 수도원을 나오는 사건 이후 알료샤는 엄연히 관찰자가 되면서 조시마 장로의 뜻대로 변화하는 세계와 그 속의 인물들을 이해하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표도르와 드미트리의 그루센카를 사이에 둔 갈등이 주요 서사가 된다. 그러나 소설의 제목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라는 점에서, 두 인물에 국한하지 않고 형제들을 비롯한 가족들과 그들의 관계를 정리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시작점에 서 있는, 형제들의 아버지 표도르는 신성한 세계와, 이상적 인간 모두로부터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재화를 밝히며 성적 욕망에 충실하고 가족에는 그러지 못한,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종교를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가족이라는 사회의 기본 단위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은 그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작중 조시마 장로가 수명을 다해 힘을 잃게 되는 신본주의의 세계를 상징하며 자연사한다면, 표도르는 반대로 이 세상에서 기능해서는 안 되는 논리, 사라져야 하는 인물로 죽임당한다.
표도르를 직접적으로 죽인 인물은 스메르자코프, 표도르가 여인을 강간해 낳게 된 사생아였다. 그 역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메르자코프는 표도르의 논리를 통해 세상에서의 존재를 부정당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어머니는 부재한 상황에서 그에게는 신이나 개인, 이상적 인간 따위의 이야기는 모두 의미없는 것이 된다. 그는 표도르를 살해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입증한다. 부친 살해로 표출되는 죽음 충동은 역설적으로 스메르자코프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부친 살해에 성공하자, 이내 자신 또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존재 증명은 자신과 유일하게 그 사실을 아는 이반에게 국한되며, 외부에는 살해가 자신의 소행임을 알리지 않는다.)
반면 아버지 표도르를 죽일 뻔한 것은 장남 드미트리다. 그는 표도르와 가장 닮았다고 불리며 그에 걸맞게 같은 여인을 두고 아버지와 갈등을 빚기도 하는 방탕한 인물이지만, 표도르를 살해하기 직전 우연히 실패한다. 드미트리는 작가가 성선설을 지지하며 그를 통해 인간이 절대적 선을 되찾게끔 만들기 위해 설정한 인물로, 어릴 적 순수하고 사람들의 보살핌에 보답하는 청년이었으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해 몰락했다는 식으로 서술된다. 그의 영혼의 본래의 선함은 아무 죄가 없으며, 자기를 버린 표도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한 그리고리를 공격한 데서 오는 죄책감에서 재발견된다. 그러나 스메르자코프가 진범임을 증명하지 못해 그는 유형을 선고받는다. 영혼이 아닌 실재적 증거에 의해 죄에 대한 벌을 받는 모습은 신의 존재가 부정당할 때의 모습과 닮아 보인다. 그러나 재판에서의 증거는 이성적이며 과학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이 또한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둘째 아들 이반이 있다. 이반은 '무신론자'로 칭해지며, 앞장서서 이성의 힘으로 신을 부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소설 중반 꽤나 많은 시간을 할애해 동생 알료샤에게 <대심문관>이라는, 자신이 직접 쓴 서사시를 소개해주며 카톨릭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반이 '아버지가 살해될 징후'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스메르자코프에게 살해 사건의 진범으로 지목당한다. 이 무렵 이반은 환각을 통해 악마를 보게 되는데, 작가는 이반의 내적 무의식이 반영된 악마의 언어를 통해 신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그로 인해 형성된 절대적 선을 향한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악마와의 결합을 가져오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이성적이라고 말하는 무신론자지만, 신을 부정하는 데서 그치고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지 못한 이반은 결국 실재하는 세계의 문제, 집안의 갈등으로부터 달아나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정말로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것인지 의심하며 괴로워하게 된다.
다시 알료샤로 돌아와, 소설의 결말부에서 알료샤는 미래 세대를 상징하는 어린 아이들의 훌륭한 지도자가 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작가가 먼저 앞서 주장한 대로, 파이시 신부의 말대로 알료샤는 신의 공간을 떠나 인간의 세계에 자리를 잡았으나 종교에서의 이상적 인간상을 좇으며 그를 널리 퍼뜨리는 지도자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른 방식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신부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이런 작가의 시각이 유효한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후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근대가 종료되었고, 이후 탈근대주의가 등장했으며 신을 존재시키는 절대적 이성은 들뢰즈에 의해 역설되기도 하는 식으로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했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그 속에서 당시 사회에 필요했던, 새로운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기 위해 당시의 세계와 신, 그리고 인간을 탐구했을 뿐이다.
P.S. 작중 여성 인물들에게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카라마조프 가의 인물들에 비해 카체리나와 그루센카는 내게는 살아있는 인물들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관점으로 그녀들이 소모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난 당신을 정말이지 사랑해요!'하고 외쳤다가 이내 다시 '하지만 난 어쩌면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요!'하고 외치는 식의 발화를 장황하게 서술해놓은 문체를 읽어내느라 지쳤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