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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 - '왼쪽으로 걷기'를 통한 애도

by joyakdo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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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트 라이브즈>의 엔딩 씬에서 전해오는 슬픔은 문장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했다. 송능한 감독의 딸로 어릴 적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패스트 라이브즈>로 데뷔한 셀린 송은, 이 이야기가 자전적인 이야기임을 분명히 하며 자신의 정서를 공유한다.


성공을 거둔 영화감독 아버지, 어린 나이에 캐나다로의 이민, 미국에서 만나게 되는 극작가 파트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그녀 자신의 것으로서 이야기로의 몰입을 더하고 관객이 감독의 진심을 읽고자 하는 강한 동기가 된다. 특히 작중 아버지의 작품으로 언급되는 '넘버11'이라는 이름의 영화는 노골적으로 송능한 감독의 <넘버3>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부분은 한국 관객에게 특별한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송능한과 <넘버3>를 관객하는 관객들은 그 순간 명확히 셀린 송의 이야기를 '떠나간 것'으로 인식하며, 자신들이 그녀에게 '떠나기 위해 두고 온 것'이 됨을 체감한다.


자신의 역사를 설명하기 앞서서 먼저 제시되는 오프닝 씬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에서 현재의 파트너 '아서'와 한국의 잊지 못할 인연 '해성'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녀는,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며 그 상황을 간파하려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여진다. 관찰자는 목소리로만 등장함으로써 관객들, 나아가 일반적인 사람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노라와 아서, 해성이 어떤 사람이며 현재 어떤 상황인지를 추측하고자 한다. 그들의 추리는 다분히 현재에 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캐나다인이 된 노라를 동양인으로 지칭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느린 속도의 줌이 들어가는 원씬원컷의 마지막 부분에서, 노라는 고개를 돌려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쳐다본다. 얼핏 미소를 짓는 듯한 그녀의 얼굴은 과거를 배제하고 현재의 자신을 해석하고자 하는 무례에 대한 조소로도 보인다. 그리고 영화는 '25년 전'의 자막과 함께 과거장면으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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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그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캐나다로 건너온 해성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데, 이는 그녀가 설명하고자 했던 자신의 역사 이야기가 끝이 났음을 알다. 영화는 다시 바에서의 대화 이후의 장면을 보여준다. 집에서부터 해성이 택시를 타러 가기까지 데려다주는 장면이 결말부로서 기능하는데, 이 장면을 조형하는 방식이 중요하다. 그들은 집을 나와 프레임 기준 왼쪽으로 꽤나 걸어간다. 화면상에서 인물이 우측으로 이동할 때 관객은 편안함을 느끼며, 그것이 올바른 걸음이라고 인식한다. 반대로 우측에서 좌측으로 움직이는 인물을 보며 관객은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패스트 라이브즈>가 결말부에서 그들의 '왼쪽으로의 걸음'을 불륜에 빗대어 부적절한 방향으로 설명한다는 해석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의 역행은 말 그대로 순행하는 시간을 거스르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잠시 현재(노라가 사는 집)에서 벗어나, 그리워하면서 지나온 역사를 거스른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나영이 해성을 떠나온 순간에 도착해, 이제는 해성이 노라를 떠나는 입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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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이 시간여행의 금기를 깨고 나영을 불러 진심을 전하는 순간, 영화는 과거장면을 인서트로 넣어 보여준다. 이는 일종의 데자뷰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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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내내 '윤회'와 '인연'을 이야기했다. 나영이 캐나다 땅으로 건너와 노라가 되었을 때, 그녀는 한국에서의 생을 마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말을 잘 쓰던 어린 나영과 다르게 노라는 한국어에 꽤나 서툴다.) 지나간 생에서 해성과 나영은 인연이었으나, 해성과 노라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지만 전생에 남겨진 기억으로 그들은 이별의 순간에서 데자뷰를 체험한다. 해성은 노라를 떠나며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 생에서의 만남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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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성이 떠나고, 노라는 떠나간 과거를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프레임 기준 우측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녀가 다시 도착한 현재에는 미국인 파트너가 마중나와 그녀를 맞이한다. (다행인 점은 현재 또한 과거처럼 그녀를 꼬옥 안아준다.) 해성 또한 감독의 삶에서의 직접적인 모티프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영화에서 해성은 단순히 주인공이 한때 좋아했던 남자로만 기능하지는 않는다. 해성은 노라가 새로운 삶을 선택함으로써 지난 생에 두고 온 것들, 상실한 것들을 상징한다. 해성과 노라가 미국에서 재회하는 것은, 그들에게 애도의 행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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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해성은 노라와 헤어진 이후 택시를 타고 프레임 우측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감독은 해성을 애도의 대상으로만 치환하지 않으며, 그의 상실 또한 다룬다. 해성이 빠져나가고 거친 속도로 지나가는 배경은 그가 다시 현재의 시간선에서 순행하는 데 충실해졌음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다음 생에서 나영을 만나기 위해 이번 생을 빠르게 지나가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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