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스템의 노동 이해, 호명 행위에서의 타자 이해

<아노라>와 신데렐라 콤플렉스

by joyakdoll



W5GJ3QJCJXXSUPRPE7YRUXM7GQ.jpg?auth=4c59dfd79e44b7410b6d48f3c76a662ec7d87c3d76bb996f6cb5cd9dc9ba8421&width=616


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 속 작품명과 동일한 이름의 아노라는 스트립 댄서로서, 성매매 행위를 통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한다. 성노동자를 주연으로 하는 대부분의 영화와 달리 이 영화 속 아노라는 매춘부라는 직업의 윤리의식에 대한 고민을 안고 버거워하지 않는다. 감독의 성매매를 옹호하며 범죄로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는 인식은 곧 영화와 아노라의 성격에 투영되며 작품은 성노동자와 세계 사이의 외적 갈등을 주요 서사로 채택한다.


<아노라>의 내러티브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개념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다. 작품은 신데렐라 컴플렉스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도 부정하거나 비호하지 않으며 현 시대의 사회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한다. 아노라는 돈을 벌기 위해 매춘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고통받기보다는, 노동자로서의 육체적 피로로 고통받으며 이로부터 벗어나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러시아 재벌 2세 이반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PtWW74wDyKWt3manXnICADheMiU.jpg


이반과 아노라의 만남이 진행되는 과정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노라가 이반의 집에 찾아갔을 때 이반은 그가 얻게 될 쾌락에 집중해 아노라에게 술을 제안한다거나, 침실과 침대부터 소개한다. 그러나 아노라는 집을 둘러보며 이반의 재력을 확인함과 동시에 어떤 '서비스'를 원하는지 묻는다. 관계를 마친 이후 아노라가 이반에 대해 가장 궁금해하며 물어보는 것도 그의 직업이다. 이어 새해맞이 파티를 같이 보내자는 이반의 제안에 명절은 가격이 비싸다고 답하거나, 일주일 동안 시간을 보내자는 제안에 가격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매매 행위가 혼인의 과정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과정을 관찰했을 때 아노라와 이반의 결혼은 성매매 행위의 연장이다. 돈이 없어도 행복할 것 같다는 이반에게 아노라는 3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맞춰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후에 부정하지만, 직접적으로 아노라는 이반의 경제적 지위를 바라보며 결혼을 맺는다. 자본과 성의 가치가 교환되는 과정은 결국 혼인이라는 결과로 완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션 베이커와 그의 영화의 입장에서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통한 결혼이나 성매매나 다를 바 없는 것이며, 이는 불편하게 바라보거나 반대로 비호해야 할 대상이 아니며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식으로 묘사된다.


88838231575_727.jpg


이러한 논리는 극중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 제시된다. 토로스, 가닉, 이고르와 같은 용역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러시아 재벌인 이반의 아버지의 명을 받아 일하는데, 그들의 업무는 때때로 폭력적이거나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방향으로 행해진다. 이는 곧 자본의 힘에 따라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그들의 직업이, 성매매와 같은 맥락으로서 제시되는 것이다. 아무 잘못 없는 노인의 사탕가게가 야구방망이로 부수어지는 과정을 목격하면, 오히려 그들의 직업 윤리가 더욱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28035_36328_3030.jpg


법의 문제를 떠나, 성노동자들이 비난받고 공격받는 관점에서의 이데올로기의 특정한 성역을 훼손하는 문제는 토로스와 가닉 형제의 상황에서 강조된다. 그들이 이반이 아노라와 혼인했음을 알고 이반의 집으로 출발하는 장소는 가닉의 아들의 세례식에서다. 아르메니아 가톨릭의 신자인 그들에게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순간일 세례식이지만 그들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자본의 힘, 고용주의 압박에 의해 자신들의 직업에 충실함을 다하게 된다. 물질적 충족을 위해 성매매를 하며 보수 카톨릭의 교리를 훼손하는 성노동이 일반적인 노동의 윤리와 다를 바 없음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화는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생겨나는 행위와 직업에 대해 이해하고, 시스템과 노동이 가지는 관계에 대해 들여다본다.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시스템이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을 묘사할 때 나오는, '팁'에 대한 개념이다. 극중 노동에 대한 가치는 반복해서 시스템의 상위자, 즉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다. 아노라의 서비스를 받는 사람들은 그녀의 속옷 끈에 현찰 팁을 꽂아주고, 이반도 아노라의 예상보다 더 큰 금액을 첫 관계 때 제공한다. 이는 곧 성매매업의 수요와 공급의 관계에서, 수요의 욕망이 더 크다는 사실을 순간적인 쾌락을 통해 큰 팁을 제공하는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공격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거래 규칙에서는 판매자든 구매자든, 서비스가 행해지기를 더욱 간절히 바라는 측이 상대방에게 금액을 정할 권리를 양보하게 된다. 영화는 지나치게 큰 금액을 사용해가며 쾌락을 물질로 충족시키려는 이반을 비롯한 남근주의의 태도를 비판한다. 이는 곧 3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요구하는 아노라에게 4캐럿, 5캐럿도 해줄 수 있다는 이반의 말, 토로스가 아노라를 이혼시키기 위해 1만 달러를 제시하는 장면에서 반복해서 확인된다.


Anora-1-e1734955058590.jpeg


그러나 동일하게 팁을 주고 받는 행위에서 다른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을 영화는 제시하기도 한다. 니콜라이에게는 그들을 따르는 부하인 토로스는, 돈을 받고 노동을 제공하는 행위에 대한 이해가 있기 때문에 집안이 난장판이 된 이후 그 공간을 청소해야 하는 가정부에게 팁을 건넨다. 이는 시스템 안에서 동등한 위치에 있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자, 그를 통해 형성되는 유대의 휴머니즘으로 연출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아노라와 용역들은 사회의 편견 섞인 시선을 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먹고 사는 문제가 위협받는 상황이 되자 상대방의 행위에 윤리적으로 제기되는 의문을 제시하며 공격한다. 아노라는 토로스와 가닉, 이고르의 이반을 만나려는 시도를 폭력적으로 이해하며 그들을 비난한다. 토로스와 가닉은 아노라를 창녀라고 부르며 아노라와 이반의 혼인을 사기결혼으로 지칭하고 위협한다. 그들은 서로를 위협하고 비난하며 공격함으로써 폭력이 벌어지게 된다. 폭력을 통해 당장 눈앞에 놓인 우선의 상황이 해결되고 나서야, 그들은 이 상황의 원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 바로 그들에게 물질을 약속하고 줄 수 있는 인물, 그러나 이 상황에서 도피함으로써 그 사실을 불확실하게 만든 이반이라는 존재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589926_929305_2327.jpg


이제 이반이라는 인물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반의 욕구는 아노라의 욕구와 결합하며, 결혼의 순간까지의 그는 아노라에게 완벽한 남성으로 제시된다. 성매매 행위를 하던 아노라를 받아들이고 그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이반은 신데렐라 스토리에 완벽히 부합하는 백마 탄 왕자님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관점에서 그는 이 영화와 감독의 관점의 반대편, 적대적 위치에 서 있다. 그가 성노동자 아노라를 수용하는 배경에는 쾌락만이 존재한다. 즉 아노라를 비롯한 성매매 종사자들이 자신의 쾌락을 충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의미를 인정하고 사랑하려 나서는 것이다.


이는 곧 자본의 힘에 의해 노동을 제공하게 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이해하고 그로 인해 행해지는 노동과 생겨나는 직업을 바라보는 감독의 관점에서는, 얼핏 같은 편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성노동자를 비난하는 시각보다 더욱 불편한 시각으로도 보인다. 결국 이반의 아노라에 대한 사랑은 단순히 쾌락이라는 목적만을 동반했기 때문에, 그들의 부모가 상징하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힘이 가해졌을 때 이반은 결혼을 쉽게 포기하게 된다. 영화 후반 아노라와의 짧은 결혼생활을 부모에 대한 일탈로 표현하는 이반의 모습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듯, 지배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쾌락을 좇아 도피성 일탈을 벌인 행위가 그 이데올로기를 좇던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 잔인하게 묘사된다.


16_45_23__67287b93cfa1d%5BW578-%5D.jpg


이 영화의 신데렐라 스토리와 쾌락을 좇은 일탈에 대한 해학은 극 후반부 다른 인물을 통해 다시 행해진다. 자신을 공격하는 이반의 어머니 갈리나에 대해서, 아노라는 이반이 당신을 조롱하기 위해서 자신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 말을 옆에서 들은 이반의 아버지 니콜라이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이 장면은 영화 속 물질만능주의의 시스템 맨 위에 서 있는 니콜라이가 영화 속 벌어지는 모든 아이러니를 이해하자 터뜨리는 웃음이다. 다시 말해 시스템 안에서 고통받을 일이 없는 니콜라이는 자신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용역들과 남근주의 이데올기를 따르는 가족들 사이의 갈등이 웃기기만 한 것이다. 그는 순간 혼자서 신데렐라 스토리를 꿈꾸는 아노라와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된 아내 갈리나가 겹쳐보이는 유머를 상상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반이 아닌 다른 인물이 신데렐라 스토리 속 진짜 왕자님처럼 제시된다. 첫 등장부터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보여줌으로써 특별한 인물로서 강조된 이고르는 단순히 아노라의 구원자로 그려지지 않는다. 자본의 시스템을 맹신하고 따르다가 시스템 자체의 무용을 깨달은 것은 아노라 자신의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 이후, 어쩔 수 없이 시스템에 순응해 살아야 하는 현실 속에서 이고르는 희망을 제시한다. 진부할 수 있겠지만 휴머니즘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다.


28035_36329_310.jpg


위에서 언급했듯이 아노라는 첫 만남의 난투극 씬에서 이고르에 대한 오해를 가진다. 그러나 이고르는 순간적으로 공격받지 않기 위해 아노라를 제압하지만 그 이후에 그녀를 적대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아노라에게 공격받을 때 자신의 고통에 집중했던 것처럼, 그는 이후 아노라의 고통에 집중한다. 추위에 떠는 아노라에게 스카프를 건네주거나, 그녀를 제압하기 위해 손을 묶었던 일을 사과하려 하거나 하는 등으로 그는 인류애 섞인 모습을 보여준다. 폭력적으로 연출되는 사탕가게 씬에서도, 그는 시스템의 요구에 의해 충실하게 노동할 뿐이며 또한 상대방이 꺼낸 야구방망이를 통한 복수라는 점에서 참작의 여지가 있다. 이는 사탕가게를 나와서 쓸모없어진 야구 방망이를 바로 바다로 던지는 장면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아노라를 지켜주는 휴머니즘은 때때로 시스템 안에서 무력하기도 하다. 라스베가스에 가서 이혼절차를 밟기 위해 비행기를 타라는 협박 앞에 아노라는 뒤에 서 있는 이고르를 바라보지만, 이고르는 어쩔 수 있냐는 듯이 씁쓸한 표정을 지을 뿐이다. 이때의 얼굴은 감독의 전작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윌렘 데포가 연기한 바비를 떠올리게 한다. 현실에 힘겨워하는 인물의 고통에 공감하지만 선뜻 나서서 도와줄 수는 없는, 휴머니즘의 슬픈 얼굴을 감독은 반복해서 연출해낸다.


19710_41055_491.jpg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아노라는 휴머니즘이 가지고 있는 힘과 희망을 영화의 마지막에서 발견한다. 이는 곧 휴머니즘을 상징하는 이고르라는 인물이 호명 행위를 통해 타자 아노라를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영화에서 개인의 정체성과 이해를 이야기할 때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일종의 관습이 되어왔다. 그러나 영화는 타자의, 타자에 대한 호명 방식에 물음을 던지며 이름이라는 소재를 영화에 입체적으로 사용하는 데 성공했다.


먼저 아노라는 극중 '애니'라는 이름의 약칭으로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 'Any'는 'Anytime', 'Anycall', 'Anyone'의 단어들을 연상시키며 성노동자로서의 아노라를 상징한다. 그녀는 다가오는 남자들에게 자신을 '애니'로 소개하며 호의를 표하고, 이반 역시 아노라에게 처음부터 자신을 '반야'라는 약칭으로 불러달라고 요구한다. 서양 사회에서 긴 이름에 대한 약칭을 별도로 가지는 것은 일종의 관습으로 존재한다. 친한 상대에게 약칭으로 부르는 것을 허용하지만 아노라와 이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이기 위해 처음부터 약칭을 알려주는 경우도 있다. 영화는 이러한 호명 방식을 경계한다. 약칭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아노라>에서 쾌락을 위해 낯선 상대방에게 약칭을 일러주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과 타자에 대한 이해가 모두 부재하는 결과를 맞는다.


이에 영화는 이고르를 통해 대안을 제시한다. 이고르는 아노라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며 그 이름이 가진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 친분을 과시하기 위한 약칭 대신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 전체를 이해하려는 행위를 통해, 이고르는 아노라를 타자로서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증명한다.


자신의 이름을 이해하려는 이고르에 아노라는 흔들리지만, 선뜻 경계를 풀지 못한다. 앞선 상황들로 인해 형성된 이고르에 대한 오해가 완전히 걷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노라는 이고르가 자신을 제압했을 때, 가닉이 없었으면 자신을 강간했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이고르에게 아노라는 그러지 못한 이유가 이고르가 겁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잠을 자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간다. 이 장면은 굉장히 의미심장한데, '가닉이 없었으면'이라는 가정은 곧 지금의 상황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공간은 이고르가 아노라를 제압했던 공간이며 동시에 아닉이 없는, 다시 말해 이고르가 무력으로 아노라를 강간할 수 있는 상황으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아노라는 마지막으로 이고르의 자신에 대한 사랑을 시험한다. 그 사랑이 휴머니즘이 내재되지 않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의한 사랑이라면 자신을 강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Anora%20crop.png


그러나 이고르는 아노라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가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이 '워리어', 전사를 뜻한다고 말했던 이고르는 자신이 가진 힘을 아노라를 굴복시키는 데가 아닌, 그녀를 지켜주는 데 사용하는 올바른 전사로서의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이고르가 아노라를 집 앞에 데려다주고 차 안에서 마침내 숨기고 있던, 토로스에게 뺏겼던 4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돌려주는 장면에서 아노라는 이고르가 제시하는 휴머니즘을 직시한다. 반지를 건네는 행위는 이고르의 반복적인 단독 샷의 제시를 통해 관객이 계속해서 바라게 됐던, 아노라에 대한 프로포즈가 이고르를 통해 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고르에게는 자신의 쾌락보다 아노라에 대한 인류애가 우선된다. 그는 반지를 건네고 말없이 차에서 내려 아노라의 짐을 꺼낸다.


아노라는 이 과정에서 크나큰 혼란을 체험한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이고르의 사랑이 이반의 것과, 지금까지의 다른 남자들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느낀다. 아노라는 움직이지 못하고 차에 남는다. 그녀는 다시 돌아온 이고르에게 안겨 관계를 시작한다. 여기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로서의 아노라의 성격이 드러난다. 그녀는 종종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자신의 노동보다 지나치게 큰 가치의 대가에 대해서 거부하거나 이미 받은 대가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신과 일주일을 보내기 위한 이고르의 제안에 오히려 금액을 낮추거나 한 시간 금액을 받고 관계를 맺은 후 시간이 남자 한 번 더 할 것을 제안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노동자-서비스 공급자로서의 논리는 자신에게 반지를 준 이고르에게 성을 헌납해야 하는 의무로서 나타난다. 이는 긴 시간의 반복적 노동을 통해 아노라에게 학습된 것이지만 이고르가 자신에게 건넨, 그리고 자신이 이고르에게 느낀 감정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EB%8B%A4%EC%9A%B4%EB%A1%9C%EB%93%9C.jpg?type=w1


결국 성노동을 통해 아노라라는 인물에게 노동-서비스 공급의 형태로 학습된 사랑은 그녀를 고통받고 몰락하게끔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현된다. 그러나 그 고통은 여전히 남아 아노라는 자신에게 키스를 하려는 이고르를 밀어내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이고르라는 존재라도 그녀에게 희망으로 남겨놓고 싶은 바람일지 모르겠지만, 이는 아노라가 이고르의 사랑을 거부하고 밀어내는 장면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서비스의 형태로 실천할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미국 영화의 시대에 대한 무례와 무시 (혹은 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