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모

by 김작가

마모

1. 감정이 마모되면 살기 편하다. 어떤 유형의 사람 앞에서도 쉽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문득 작아져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한없이 아프다. 발이 잘려나간 사람이 여전히 발이 있다고 믿으며 통증을 느끼듯, 깎여나간 감정에게서도 아픔과 흔적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고통은 끝없이 침식과 부식을 반복하다 모래가 되어 사라지겠지. 난 아직 깎여나가는 중이라 모래가 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다행일까.


2.7월은 토마토가 익는 계절이라 아무 토마토나 골라잡아도 시고 달다. 위가 작아져서 토마토 하나면 배가 부르다. 어제는 토마토 두 개로 하루를 버텼고, 오늘은 토마토 하나와 초코우유 하나에 허기가 사라졌다. 밥을 왜 안 먹느냐고 물으면 입맛이 없어서라고 밖에 말하지 못한다. 토마토는 왜 먹냐고 물으면 열정을 먹는 것 같다는 헛소리를 한다. 의욕의 땅에 가뭄이 들었으나 토마토만 살아남은 것 마냥 토마토만 눈에 들어온다. 케첩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토마토를 매일 먹는다. 첩첩.


3. 지난 주만 하더라도 방이 작게 느껴졌는데, 이번 주에는 또 꽤 넓어 보인다. '내가 이런 방에 살아도 되나' 생각이 들 정도. 내가 작아졌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모두 열심히 살고 또 잘 살고 있어서, 어렸을 적 친구들을 만나도 이제는 다르다. 스무 살 초반에 난무하던 충고와 조언의 계절은 오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꽤 어른이 되었구나 싶었는데, 때마침 영대에게서 걸려온 전화. "나 우울하고 심심해 놀아줘" "아직 그 문제가 해결이 안 된 거야?" "몰라 그것도 있고 딴 것도 있고" 몇 마디 들으니 입에 가시가 돋았다. 오랜만의 공격 찬스에 생기가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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