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을 통해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라
삼성전자의 위기, 특히 반도체 사업의 위기를 분석하는 기사를 읽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삼성은 고객과 경쟁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파운드리 사업은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 기업의 의뢰를 받아 고객 맞춤형으로 반도체를 제작해 주는 것인데, 삼성은 자체적으로 반도체 설계와 생산을 포함한 통합 솔루션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객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고객들의 반도체 설계와 관련된 정보가 경쟁사가 될 수도 있는 삼성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며, 이는 대만의 TSMC가 오직 파운드리 사업에만 집중하며 기업의 모토를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에 두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TSMC는 현재 파운드리 시장에서 압도적인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삼성은 점차 존재감을 잃어가는 형국이다.
삼성의 위기를 보며 한국 컨벤션센터의 위기를 걱정하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지금 국내 컨벤션센터 시장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와도 같다. 각 지자체별로 컨벤션센터 건립과 증축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고 있으며, 이는 지자체의 도시 개발 정책과 맞물려 마치 마지막 열차를 타려고 달려가는 사람들처럼 저마다의 명분과 논리로 건립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어느 지역의 컨벤션센터이건 사업 모델은 다 비슷하다. 행사 유치와 전시장 임대를 대관 사업이 있고, 시설 관리와 부대사업장 운영을 위한 사업이 있으며, 자체적으로 전시회 개최를 위한 주관 전시 사업이 있다. 외형적 건축 디자인은 조금씩 다르지만 실제 사업 모델과 운영 조직은 차별점을 거의 찾을 수 없고, 전시장 간판만 떼면 여기가 어디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부 회의실이나 전시장 디자인도 모두 비슷하다.
특히 주관 전시회를 사업 모델로 가져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다. 국내 컨벤션 센터의 운영 모델은 대부분 코엑스를 벤치마킹 하여 적용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국내 컨벤션 센터 건립 붐이 일 당시 킨텍스나 벡스코 등 초창기 센터들은 대게 한국 컨벤션 센터의 원조인 코엑스 모델을 도입했다. 또는 해외 전시장들의 운영 모델을 벤치마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독일식 모델, 즉 전시장이 직접 전시회도 개최하는 방식을 가져왔다.
컨벤션센터가 주관 전시회 사업을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가동률이라는 KPI 달성과 흑자 운영을 위한 수익 사업, 이 두 가지 때문이다. 가동률은 1년간 전체 전시장 가용 면적 대비 실제 사용 면적의 비율인데, 대개 60%를 넘어가면 완전 가동률로 본다. 설치와 철거, 유지 보수기간을 제외한 실 가용면적이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전시장을 채우려면 대관 사업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체 전시회 사업을 해서 부족한 나머지 가동률을 채우는 것이다. 또한 겉으로는 지역 발전과 산업 발전을 통한 경제 성장의 마중물 역할이라지만 대부분 지자체 감사를 통해 자체 수익 달성을 강요받는다. 주관 전시회는 컨벤션센터의 매출 달성이라는 목표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사업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 컨벤션 센터들이 진정으로 한국의 마이스 산업, 특히 전시산업의 발전을 생각한다면 전시회 개최 사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첫째, 컨벤션 센터가 자체적으로 특정 산업 전시회를 개최하면 동일한 전시회를 개최하는 민간 전시 주최자의 전시장 대관에 피해가 간다. 유사 전시회를 비슷한 기간에 배정하면 상호 피해가 가기 때문에 보통 3개월 이내에는 전시장 대관을 해주지 않는다. 이 경우 주관 전시회가 컨벤션센터 대관에 우선권을 받을 수밖에 없고, 이는 결국 민간 전시 주최자의 사업권 및 전시 사업 성장에 역행하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컨벤션센터가 배정권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민간 전시 주최자의 전시 사업에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둘째, 컨벤션센터가 대형화될수록 자체적인 IT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는데, 주관 전시회를 하는 컨벤션센터의 IT 인프라를 민간 전시 주최자가 사용할리 없다. 전시 주최자는 참가기업이나 관람객 정보 그 자체가 하나의 자산인데, 이 데이터가 컨벤션센터에 넘어가면 안 되기 때문에 컨벤션센터의 인프라를 사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이미 수십억 원의 인프라를 깔아놓고도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전국 전시장 로비나 입구의 등록시스템, 티켓 발권 시스템, 로봇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전시회가 대형화될수록 전시회를 효율적으로 관람하고자 하는 욕구가 커질 것인데, 이를 위해 필수적으로 지원되어야 하는 기술이 바로 AI이다. AI는 관람객과 참가기업의 데이터를 매칭하여 1:1로 바이어나 만나야 할 기업을 추천해 준다. 전시회의 고객들은 매년 동일한 전시회를 방문하기 때문에 AI가 패턴을 읽어내기에 가장 좋은 데이터들이다. 이미 CES나 글로벌 스타트업 포럼 등은 AI를 활용하여 고객 간의 추천 시스템을 도입하고 있다. 한국 전시회들도 이 흐름에 뒤처질 수 없기에 AI 도입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구축 비용이나 지속적인 관리 문제 때문에 기술 도입에 주저하고 있다. 따라서 컨벤션센터가 기본적으로 AI 인프라를 구축하고 이를 전시 주최자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해주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역시 위에서 언급한 동일한 이유 때문에 민간 전시 주최자들은 컨벤션센터의 AI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기업이 경쟁사에 고객 데이터를 넘겨주면서 서비스를 이용하겠는가?
마지막으로 컨벤션센터의 주관 전시회 사업은 센터의 창의적 수익 모델 창출이나 효율적 조직 운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컨벤션센터는 기본적으로 공간 비즈니스이다. 공간을 더욱 활성화하여 사람들에게 미래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지역의 로컬 문화, 산업 콘텐츠와 결합하여 도시의 체류시간을 늘리고 지역 소멸에 대응하는 생활 인구 유입에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간 운영을 위한 인력은 극소수이고, 주관 전시회 개최를 위한 인력을 배치하다 보니 전시회 발전에도 도움이 안 되고 심지어 컨벤션센터에 큰 꿈을 안고 입사했다가 매일 전화기 앞에 앉아 TM만 하는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어 퇴사하는 직원도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주관 전시회 사업은 정직원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계약직 인력만 늘리는 기형적 구조를 만들어 컨벤션센터의 운영 노하우 축적에도, 조직 운영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수익 달성 부분에 있어서도 사실상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매출 목표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실제 투입되는 인건비를 제외한다거나 공동 주최기관과 협약을 통해 컨벤션센터가 매출을 가져오고 수익만 공유하는 구조를 만드는 등 상호 협력이나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것도 문제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이 모든 컨벤션센터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또한 주관 전시회를 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민간이 할 수 없는 공공을 위한 행사나 지역 발전을 위한 명분이 있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라도 민간 전시 주최자에게 행사 기획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컨벤션센터는 오히려 공간 지원이나 체류시간을 늘리는 콘텐츠 개발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맞다. 민간 주최자의 역량을 컨벤션센터가 가져가는 것은 결국 앞으로의 한국 전시회나 컨벤션 등 마이스 산업의 확대와 혁신, 그리고 유니콘 기업으로의 성장을 늦추게 되는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 마이스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컨벤션센터와 민간 전시 주최자가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컨벤션센터가 지역 특성에 맞는 독창적 운영 모델을 마련하고, 민간 주최자가 경쟁보다는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공성과 협력을 기반으로 한국의 마이스 산업은 지역 경제 활성화와 산업 발전을 통해 국제적 경쟁력을 확보하고, 장기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결국 TSMC가 삼성을 누르고 파운드리 시장에서 세계 1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TSMC처럼 고객과 경쟁하지 않고 상생할 때, 한국 컨벤션센터도 마이스 산업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고객과 경쟁하지 않고 상생하는 컨벤션센터가 최소한 하나쯤은 등장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