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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오늘 Mar 07. 2023

가만히 있어도 마이너스가 되는 하루

'0'의 상태만 유지해도 좋을 텐데


가만히 있기만 해도 계속해서 마이너스로 향하는 하루가 있다.



디폴트 값이 0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1, -2, -3... 이 되는 하루 말이다.


이 수치는 내가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다시 올릴 수 있다. 예를 들면 좋은 습관이라 일컬어지는 것들이다. 청소하기, 운동하기, 좋은 음식 챙겨 먹기, 명상하기, 책 읽기 등등.... 이런 것들을 해야 겨우 '0'의 상태를 지나 플러스로 끌어올릴 수 있는데,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 생산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 나의 수치는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듯 주르륵 떨어지고 만다. -10, -20, -30.... 이 숫자들에는 갖가지 이름이 붙여진다. 죄책감, 자괴감, 자책, 후회 같은 것들.


차라리 마이너스가 아닌 0의 상태만 유지해도 좋을 텐데.


간신히 플러스로 끌어올린 뒤면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또다시 내 상태는 마이너스를 향해 간다. 이 모습은 마치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하드 모드로 삶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열심히 또 열심히 퀘스트를 깨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게임 오버가 되고 마니까.


언제부터 이랬을까?


태어날 때부터 난이도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언가에 쫓기듯 혹은 무력하게 항복하듯 살아 오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삶 자체가 원래부터 힘들었던 게 아니라 나를 괴롭혀 오는 마이너스 요인이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자리 잡았다는 걸. 그저 의지가 약한 나 자신을 탓하고, 남 탓을 하고, 사회 탓을 하기 바빴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을 욕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그나마의 씁쓸한 위안을 얻고는 했었던 거다. 그것이 도리어 나를 갉아 먹는다는 것을 모른 채.


나는 강박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내가 내는 성과는 다 완벽해야 했으며, 똑똑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으며 누군가 내 바보 같은 모습을 알아차릴까 무서웠다. 당연하게도 나는 무엇 하나 쉽게 시작하기 어려워졌고, 무언가에 부딪히고 맞서기보다는 숨기를 선택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실패할 일도 없고, 완벽하지 못해 스스로의 약한 모습을 내비칠 일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 우울이 찾아 왔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스스로를 옥죄고 있었기에 행복보다는 우울에 가까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쉽게 해소할 수 없는 우울은 내 안을 점점 더 넓게 채워 갔고, 어느새 나는 푸른 바다에 잠겨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나의 마이너스 상태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자신이 되고 싶었는데 그럴수록 나는 왜 더 작아지는 것인지. 마이너스 상태를 인지하고 나서는 어떻게든 플러스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삶을 살았다. 나태하게 웅크리고 있는 나 자신을 억지로 일으켜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운동을 해서 체력이 좋아지고, 하지 않던 일에 도전해 나름대로 좋은 성과를 내고,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 내 기분을 끌어올렸다. 그렇지만 내 몸은 여전히 바다에 있었다. 이러한 행동들은 깊은 바다 속에서 발버둥을 치는 것과 같아서 간신히 수면 위로 올라올 수는 있었지만 언제든 가라앉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발버둥 다음은 꼬르륵. 그렇게 또 가라앉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해서 나는 어떤 책이든 읽고,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전달하고 있는 내용은 제각기 달랐지만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같았다. 더 깊게 가라앉아 볼 것. 언제나 벗어나려고만 했던 그 바다를 차분히 들여다볼 것. 그제서야 나는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내 안에 살고 있던 완벽이와 강박이를.


완벽이와 강박이.

이 친구들의 생김새를 묘사해 보자면 디즈니 캐릭터 같기도 하다. 크고 동글동글한 눈망울에 키가 작은 꼬마 두 명. 그동안 나를 괴롭혀 왔던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어리고 연약해 보인다. 나는 괴물처럼 끔찍하게 생긴 줄 알았지. 이렇게 귀여운 친구들은 어딘가 슬퍼 보이고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얼굴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완벽과 강박. 둘은 이렇게나 친한 사이인 거구나.


누구나 마음 속에 상처 받은 어린 아이가 한 명쯤 살고 있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은 생각보다 개인의 삶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쳐서 혹여나 어릴 때 받은 상처들이 제대로 치유되지 않는다면 긴 시간을 아파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나도 내 안의 어린 아이가 아파하고 우는 모습을 외면하고 싫어했기 때문에 그 아이가 분열해 진화하게 된 것이 아닐까? 완벽이와 강박이로. 이러한 생각을 하고 나면 왠지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냥, 나의 내면을 형상화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재미있어서.


앞으로 나아가는 법은 알고 있었지만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는 오랫동안 쓰러진 채로 머물러 있었다. -1, -2, -3.... 이제는 단단하게 서 있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마이너스와 플러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만든 개념에 불과했다. 이제는 나를 갉아 먹는 요인이 무엇인지 알았고, 단순한 발버둥으로는 나를 끌어올리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다.


좋은 습관, 생산적인 행동.

그것은 분명히 삶에 도움이 되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하루를 유지해 주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러한 자잘한 행동보다 더 커다란 목표가 필요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확실하게 정립했을 때 나는 비로소 단단하게 일어설 수 있게 되고, 바다를 떠나 더 넓은 세상을 탐험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생각했다고 해서 당장 내 하루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지, 나를 단단하게 받쳐 줄 기둥은 무엇일지 스스로 질문하며 찾아가고 있다. 그 여정에는 물론 완벽이와 강박이도 함께한다. 이 친구들을 저버리기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면이 분명히 있고,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수용해 주면 언젠가 다시 순수한 어린 아이로 돌아와 함께 즐겁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도 내 삶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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